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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 - 아나키스트 노예 반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 - 아나키스트 노예 반란
  • 교수신문
  • 승인 2019.11.0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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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노예 반란을 아나키스트 반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내가 세계 최초일지 모르겠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최초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스트 반란이지, 계급투쟁이나 권력투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반란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선거제나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반란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유주의 투쟁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물론 공산주의 측에서도 스파르타쿠스를 자신들의 원조라고 내세웠다. 실제로 마르크스나 레닌도, 심지어 레이건까지도 스파르타쿠스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쿠스 소설
스파르타쿠스 소설

볼테르는 1769년에 쓴 긴 편지에서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정의로운 전쟁,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했던 전쟁"이라고 찬양했고,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파르타쿠스를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 부르며 극찬했다. 그리고 1865년에 장녀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물었을 때, 자신의 영웅으로 케플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를 꼽았다. 20세기 남미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체게바라 역시 스파르타쿠스의 찬양자였다.

위에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아나키스트 반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세계 최초라고 하는 것을 한국인이 습관적으로 한다는 세계 최고니, 세계 최대니 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건이 한국인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든 열등감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반란은 그 전에도 있었다.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에도 있었다. 노예를 소유하고 부린 자들이 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서 우리가 모를 뿐이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만큼이나 유명한 것은 없다. 이 연재, 아나키스트열전에서는 사상가만이 아니라 아나키즘의 행동가나 운동가나 실천가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스파르타쿠스를 그 최초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그 역사는 길게 이어졌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인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 3. 18~5. 28)을 비롯하여 20세기 러시아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반대한 마흐노(Nestor Ivanovych Makhno, 1888~1934), 스페인 시민전쟁의 두루티(José Buenaventura Durruti Dumange, 1895~ 1936), 멕시코혁명의 사파타(Zapata, 1879~1919), 최초의 "포스트모던" 혁명이라고 불린 사파티스타(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 EZLN) 등의 반란이다. 이 연재의 뒤에서 보듯이 그들을 아나키스트로 보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그들의 원조격인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반란 노예들도 나는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직전에도 로마는 여러 차례의 노예전쟁을 경험했다. 기원전 198년에는 라티움에서, 기원전 196년에는 에트루리아에서, 기원전 185년에는 아풀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아폴리아 반란은 다음해까지 이어졌고, 7천여 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통 노예반란이라고 하는 것은 시칠리아에서 터진 두 차례의 노예전쟁과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말한다.

유노스(Eunous, ?~기원전132)와 클레온(Kleon)을 중심으로 한 제1차 노예전쟁은 기원전 135년부터 132년에 일어났고, 살비우스(Salvius)와 아테니온(Athenoin)이 지도한 제2차 노예전쟁은 기원전 104년에 일어났다. 두 차례 모두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시칠리아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곡창지대로 대규모 농장이 있었고 그 농장에서 노예를 많이 부렸으며 학대도 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1차의 경우, 엔나의 부유한 지주인 다모필로스(Damophilos)가 노예들에게 낙인을 찍고 가혹한 매질을 하며 음식과 옷도 제대로 주지 않는 등 박해가 심했다. 반면 제2차의 경우는 로마 동맹국의 자유인 출신으로 노예가 된 자는 해방하도록 되어 있었음에도 시칠리아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이 그것을 방해한 탓이었다. 두 반란 모두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위에서 본 제1차 노예반란을 주도한 유노스는 2000여년이 지난 1960년에 시칠리아의 엔나(Enna) 시에 있는 엣 성곽 아래에 세워진 동상으로 기념되었다. 동상의 대석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불행한 흑인들을 해방하기 2000년 전에 이 도시에서 한갓 노예였던 유노스는 자신과 가련한 동료들의 자유를 외쳤고,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나고 자유롭게 죽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널리 천명했다”는 글이 새겨졌다. 

그런데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1, 2차 노예전쟁은, 시칠리아가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에서 갖가지 민족의 노예들이 함께 일어선 세계 최초의 국제 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제3차 노예전쟁으로 부르는 점에 의문이 있다. 세계사에서도 그런 반란은 2천년이 지난 뒤인 1968년에 와서야 다시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 사이 20세기 초 독일에서 그들의 이름을 딴 단체가 만들어졌지만 실패했다.

스파르타쿠스를 시대를 앞서간 프롤레타리아 영웅으로 찬양한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 1919)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rug, 1871~1919)는 1916년부터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고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었다. 전위당을 통한 혁명을 주장한 레닌과 달리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한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 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리프크네히트는 자신의 서명을 적어야 할 때 본명을 적는 대신 스파르타쿠스라고 서명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을 기반으로 1918년말 독일 공산당(KDP)이 창당됐고, 공산당 창당 직후인 1월 4일 스파르타쿠스단 봉기가 발발했다. 봉기는 2주 정도 지속됐지만 1월 15일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총살되었다.

20세기에 스파르타쿠스는 여러 차례 소설과 영화에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무성영화가 3편이나 제작되었다. 이어 아서 퀘슬러와 하워드 파스트가 스파르타쿠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고, 후자를 기초로 1960년에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스파르타쿠스>가 제작되었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읽은 것은 하워드 파스트가 쓴 소설 <스파르타쿠스>의 번역이었다. 그 책을 기초로 하여 1960년에 제작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뒤인 1966년에 나왔고, 같은 소설이 2008년에 다시 번역되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전개
노예는 농경이 발명된 이후에 등장하여 금속의 사용이 보편화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급속히 증가하였다. 노예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60년경)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성서에도 노예제가 확립된 제도로 언급되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의 고조선의 법조문에 노예에 대한 규정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선천적 노예를 인정했던 고대 아테네 인구의 5분의 2가 노예였고, 고대 로마에서도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가 노예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음을 뜻한다.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농장, 광산, 제분소, 갈레선, 검투경기장 등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비인간적 대우로 인해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노예는 인간은 아니라 물건이었다. 주인은 노예를 마음대로 처분했다. 임대나 판매, 증여나 상속도 자유로웠고 노예가 병들면 굶어죽게 해도 무방했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이었다. 그곳은 지금 불가리아 땅이어서 그곳 사람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가령 노예로 태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산 자가 그런 반란을 이끌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가 더욱더 노예의 비참한 상황을 절실하게 체험한 탓에 반란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출신 문제가 아니다. 반란이 시작된 원인이나 계기에 대해서도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지만 자유를 얻기 위한 정신의 발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파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스파르타쿠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더러운 로마놈들아, 너희들은 인간의 모든 꿈과, 인간의 손에 의한 모든 노동과, 인간의 이마에 맺힌 모든 땀을 조롱하고 있다. …너희들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취미라곤 유혈의 검투를 관람하는 것뿐이다. …너희들의 화려한 그 생활은 전 세계에서 강도질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끝장이다. 전세계의 노예들에게 우리는 외칠 것이다. 일어나라! 쇠사슬을 풀어버려라!”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74명의 노예 글레디에이터, 즉 검투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원전 73년부터 그들은 부자와 군대의 재산을 빼앗고 노예를 해방했고 그 노예는 대부분 그들의 군대에 합류해 그 무리는 6-7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는 당대 이탈리아 노예 수인 100~150만 명의 4~7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를 뜻하는가는 배리 스트라우스가 <스파르타쿠스 전쟁>에서 말하듯이 19세기 미국에 약 4백만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1831년 냇 터너(Nat Turner, 1800~1831)의 반란에는 단지 2백 명만 참가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된다.(15쪽)

그러나 반란이 전개되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가령 지도자들의 갈등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를 넘어 노예의 고향인 트라키아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그에 대적한 세력은 이탈리아를 약탈하고자 했다. 또 그들은 그들이 로마에게 배운 대로 행동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즉 복수심에 불타 모든 것을 불태우는 실수를 범했다. 그들을 억압한 로마의 군사 전쟁 체제의 잘못된 근원을 바로 잡지 못했다. 또한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바로 술과 향락에 빠져들거나 포로를 자신들처럼 전투사로 만들어 즐기는 역할전환극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노예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롭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대안 사회인 아나키즘 공동체를 실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특히 로마의 성문까지 이르렀지만 그 도시 접수를 망설인 탓이었다. 그 이유를 역사는 기록하지 않아 짐작하게 할 뿐이다. 노예군의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로마를 포함한 여러 도시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지, 특히 노예들이 지지하기커녕 주인들에게 쉽게 복종했는지, 그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노예들은 시칠리아에 정착하고자 했지만 시칠리아인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아 그곳으로 건너올 배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패배한 노예들은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않았다. 6천 명이 넘는 노예들이 카푸아에서 로마에 이르는 아피아 가도에서 교수형이나 십자가형을 당했다. 로마군은 그 시신을 그대로 두도록 하여 그곳을 지나는 자들은 수년간 그들의 십자가를 보아야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처형 직전에 로마군은 노예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노예였고 노예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끔찍한 형벌은 오지 하나의 조건, 즉 너희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라고 부르는 자의 시체나 산 몸을 알려 주는 것에 의해 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산비탈에서 한 남루한 노예가 일어서려고 한다. 다른 자들처럼 피투성이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외치기 전에 그 옆의 자가 일어나 외친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그러나 더 낮은 곳에서 일어나 소리친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그 소리는 끝없이 이어진다.     

스파르타쿠스 재현
노예 반란의 마지막에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고 모든 노예들이 외친 소리는 끝없이 역사에서 이어진다. 그 하나가 켈트어로 ‘인민의 모임’이나 ‘반란자 집단’ 정도를 뜻하는 바가우디(Bagaudi)였다. 즉 기원후 283년부터 417년까지 갈리아 지방에서 탈영 군인과 농민들의 집단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갈리아는 기원전 50년 카에사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곳 귀족과 상인들은 로마에 협조했으나 농노와 농민은 저항했다. 농노와 농민들은 용병으로 구성된 로마군에서 탈출한 군인들과 험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바가우디였다. 

그들은 노예와 농노를 해방하고 농사를 다시 일으켰다. 그들이 세운 공동체인 바가우디케(Bagaudicae)에서는 모든 결정이 공동으로 정해지고 관리들은 선출되며 모두가 재판을 감독하고 권력은 연합된 농민과 군인에게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았다. 그들은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다. 역사교과서에는 실리지 않는 바가우디케는 루아르강 기슭, 서부와 남서부, 그리고 알프스에서 수십년간 노동자의 공동체로 존속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생산물로 변경에서 전투를 담당한 군대를 유지했다. 그런 현상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마흐노의 군대로 부활했다.  

에우누스
에우누스

 

최초의 바가우디는 봉기 3년 뒤인 286년에 로마군에게 패배했으나, 그 뒤 2세기 동안 저항은 이어져 5세기에도 산발적인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 특히 404년에서 417년 사이에 노르망디에서 카스코뉴에 이르는 대서양 해안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바가우디는 그 주변 삼림지대에서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 뒤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라 로마가 후퇴할 때 바가우디도 로마인 축출에 참가하고 자신들의 땅을 스스로 다스렸다. 그 뒤 로마는 서서히 망해갔다.  

이후 중세 천년동안 영주들의 횡포에 맞선 농민반란이 계속 이어졌고 반란 동안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발적으로 만든 법에 의해 대표를 민주적으로 뽑았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996년부터 이듬해까지 노르망디에서 행해진 자주관리운동이었다. 그것은 영주에 의해 무참하게 토벌되었으나 그 2백년 뒤인 1160년에 로베르 웨이스(Robert Wace, 1100~1174)는 <루 이야기>(Roman de la Rou)에 그들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썼다.

왜 우리는 고통을 받아야 하나?
그들의 위험에서 벗어나자!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야
우리의 팔다리는 그들과 다름없고
우리 몸집은 전혀 작지 않아
우리는 참을 수 있을 만큼 강해
우리에게 부족한 건 바로 용기야
그러니 맹세로 자신을 구속해야해
우리가 가진 것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 하나로 뭉치자!
그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걸어오면
우리 3, 40명의 농민들이
건장한 싸움꾼들이
저들 기사 하나와 맞설 수 있잖아
저들은 저주받으리라, 저들이 오면
꽃다운 청춘 30명이 정면으로 맞서리라
그들 중 아무도 우리와 겨눌 수 없어
몽둥이와 큰 지팡이를 들고
화살과 곤봉으로
활과 화살과 도끼로
무기가 없으면 돌이라도 들고서
우리 모두 그를 공격하면
우리는 숲으로 들어갈 수 있어
나무를 넘어뜨려 원하는 것을 얻고
연못가에서 고기를 낚고
숲에서 사슴도 잡고
그 모두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숲, 들판, 그리고 냇물도.  

카를 리프크네히트
카를 리프크네히트

그 목소리는 한반도에서도 터져 나왔다. 바로 고려 노예 만적(?~1198)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왜 우리만 상전의 매질을 당해가며 뼈가 빠지게 일만 해야 하는가!”라면서 노예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목소리가 1381년 영국에서도 터져 나왔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누가 귀족이었던가?” 반란 뒤에 18개 마을의 대표자가 모인 회의를 시작으로 자주관리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조직인 길드를 가지고 있었고 법정에서도 역할이 있었다. 반란은 와트 테일러(Watt Tayler)와 존 볼(John Ball)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며 노예나 농노는 그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귀족도 농노도 없이 모두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하고, 자유, 평등, 평화를 위해 판사, 배심원, 형리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군주권을 모두가 향유하는 민중군주정을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 군주권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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