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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은 양성평등으로 가는 등대
‘성인지 감수성’은 양성평등으로 가는 등대
  • 허정윤
  • 승인 2019.10.07 0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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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내 성폭력 해결책 없나
대학 성평등 전문가에게 듣는다 (3)

대학내 상담센터가 엑스트라가 되지 않으려면

“성인지 감수성은 일상에 ‘스며들어야’ 해요.”
고려대 양성평등센터 전문상담사로 재직 중인 노정민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 대표는 대학 내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성폭력 문제 근본에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를 꼬집었다.

노정민 대표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고려대 양성평등센터 전문상담사 ⓒ허정윤
노정민 대표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고려대 양성평등센터 전문상담사 ⓒ허정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미투로 촉발된 스쿨미투 운동을 기점으로 사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개인이 겪은 문제로 여기지 않고, 대학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중차대한 문제로 인지하면서 대학 내 상담소는 물론 정부 부처에서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노 대표는 고려대 성평등센터에서 2004년부터 근무를 시작해 지금까지 고려대 학생들을 만나며 성희롱·성폭력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노 대표가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이하 협의회)는 올해 3월부터 교육부 산하 대학 성희롱 성폭력 근절 중앙센터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협의회는 2003년 서강대 김영희 교수를 주축으로 한 작은 모임(전국 대학 성폭력 상담실무자 협의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만 해도 각 대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할 방법이나 상담법이 구체화하지 않은 시기였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근절이라는 같은 숙제를 안은 담당자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다 보니 지금의 협의회까지 이르게 됐다. 노 대표는 2016년부터 협의회의 대표를 맡아 세미나와 상담 교육에 힘쓰고 있다.

노 대표는 ‘대학’이라는 공동체가 가지는 특성이나 여러 가지 사정들은 사회에서 말하는 조직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은 학생과 교수는 물론이고 강사와 행정 직원 등 다양한 관계가 작은 공간에 엮인 곳이다. 그렇다 보니 내부 구조를 알지 못하면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 지점을 찾기 어려운 조직이라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협의회는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고 실무자들의 정보 공유 네트워크를 조직해서 활동해왔고, 교육부도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협의회에 협력을 요청해 학내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협의회는 대학과 정부 부처를 잇는 ‘다리’로 자리 잡았다.

고려대 성평등센터 입구 ⓒ허정윤
고려대 성평등센터 입구 ⓒ허정윤

미투 이후 성희롱·성폭력 상담을 맡은 센터들은 분주해졌다. 사건 발생 신고도 있지만, 자신이 피해자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학생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성희롱과 관련한 일반 문의를 해오는 학내 구성원들이 늘었다는 게 실무자들의 대답이다. 노 대표는 “고려대의 경우는 예전부터 이런저런 사건들이 꾸준히 있었기에 미투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다른 학교 실무 담당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에 띄게 상담 건수가 는 것은 사실”이라며 전반적인 대학 분위기를 전했다.

노 대표는 “대학이라고 하는 큰 조직 안에서 성희롱·성폭력 주제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지 못하는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학처, 학생처, 교무처 같은 부서는 상시 인력이 상주하고 지원도 많은 편이지만, 성희롱·성폭력 근절 관련 기구는 사건이 터져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엑스트라에 불과한 실정이라는 게 노대 표의 설명이다.

지금은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늘’ 존재한다는 사실이 미투를 통해 알려졌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대가 형성됐다. 노 대표는 “아직 교내 문화는 기구의 중요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하긴 어렵지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잘 처리해야 후폭풍이 없다는 것은 인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기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와중에도 인력배치나 예산분배 문제에 있어서 항상 뒷전에 밀리고 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노 대표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최일선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이 와서 초보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가령 5년 전 성희롱 사건을 처리한 실무자가 있었다 해도,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을 때 그 담당자는 학교를 떠나고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학내 구성원들의 반응은 “대학의 대처가 부실하다”, “센터가 유명무실하다”는 식이다. 노 대표는 “전문적인 인력이 자신의 업무상 역량을 강화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코앞의 문제만 해결하다가 계약 해지를 당하는 게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낮게 만든다. 다만 학교마다 문제해결 능력의 편차는 큰 편이다. 큰 사건을 겪은 학교들은 학교 내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교내 처벌을 통해 문제를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센터의 입지를 강화하는 경향성을 띤다.

고려대의 경우는 2011년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을 출교 처분으로 처리해 성평등센터의 입지를 다진 바 있다. 경찰의 행정 처리보다 교내 사건을 발 빠르게 파악해 움직인 결과다. 노 대표는 “학교에 따라서 규모나 운영방식이 달라 일괄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인식 수준이 올라온 만큼 교내에서 센터의 지위가 안정적으로 확보돼야 구성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교육부
ⓒ교육부

노 대표에게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센터의 보직교수가 해당 문제에 전문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노 대표는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노 대표는 “어떤 교수가 센터장으로 와도 ‘성폭력’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여성학이나 법률을 공부하지 않아도 업무 담당자들을 존중하고 소통하는 리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더불어 관련 업무를 하는 데에 있어서 ‘성인지 감수성’에 얼마나 민감한지가 가장 중요한 척도인데 이는 보직 교수의 전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노 대표는 ‘성인지 감수성’을 ‘인사’에 빗대어 말했다. 어린아이가 어른을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교육으로 체득된 경우라며, 성인지 감수성도 그러한 개념에서 교육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노 대표는 최근 붉어진 강단 위 성희롱 발언 같은 경우는 5060 세대의 교수들이 과거에 성인지 감수성을 체득할 기회를 얻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해당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말이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고, 학생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분석했다.

노 대표는 대학 내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련 수업을 교양·선택 수업으로 배정해 학생들이 자주 해당 사안을 접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대학이 졸업 요건으로 해마다 관련 수업을 이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의 경우 2017년부터 교육과정 편성·운영 세칙 제43조에 따라, ‘인권과 성평등 교육’을 수업연한 내 학년별 1회, 재학 중 최대 4회를 이수해야 졸업 요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했다.

노 대표에게 어떤 인식이나 지원이 재고되어야 하냐고 묻자 “최종 결정권자와 정부가 중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 대표는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는 총장이다. 결국 최종 결정권자의 성인지 감수성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게 하고, 성평등 문화 확산에 기반이 된다”고 입장을 밝혔다. 협의회 차원에서 여가부를 통해 총장협의회에 이 같은 의견을 전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노 대표는 정부에게도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원을 촉구했다. 특히 ‘자율’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법정 교육을 위한 최소 콘텐츠를 제공해준다든지, 해당 업무 부서를 독립기구로 운영할 수 있는 권고 기준을 마련한다든지, 업무담당자가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중앙센터 프로그램에 참석할 수 있도록 대학에 가이드라인을 주는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담당자의 고용 형태가 계약직인 형태가 대다수라 세미나 같은 업무 역량 증진 관련 프로그램에 참석할 때도 학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현직자들의 고충이다. 2018년 교육부가 조사한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희롱·성폭력 관련 고충상담 담당자의 고용 형태는 기간제 계약직이 41%, 무기 계약직 18.3%, 정규직 38.8%로 불안정한 비중이 높았다.

협의회와 사업을 함께하고 있는 교육부 양성평등정책담당관 관계자는 “교육부가 담당자 고용에 대한 예산까지는 지원하지는 않기에 대학에 채용 형태를 강제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담당자들이 충분히 문제 해결 절차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협의회와 함께 매뉴얼을 개발해 역량 강화에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교육부
ⓒ교육부

노 대표는 학교 차원에서는 징계 양정에 개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전에는 성희롱·성폭력 가해 행위 가해자에 대한 징계 결과를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피해자에게 알리지 못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어느 수의의 징계를 받았는지 모르는 상황에 부닥쳐 답답함을 호소하게 된다. 지금은 국가공무원법이 개정(2018년)돼 성관련 문제로 징계를 받은 경우 피해자가 자동으로 징계 수위 정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립대는 여전히 본인(가해자) 동의 없이는 이 같은 정보를 알 수 없다. 사립학교 교원에 대한 징계 결정 내용을 피해자에게 통보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노 대표의 주장이다.

노 대표는 대학 내 기구(센터)들이 정돈된 가이드라인과 업무 처리에 대한 재원과 인력 충분히 지니고 전문성을 갖출 때, 피해자들을 신속하게 도울 수 있고 성관련 문제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허정윤 기자 verit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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