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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9)-다산 생가에서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29)-다산 생가에서
  • 교수신문
  • 승인 2019.09.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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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터미널이 되어야 한다
다산의 다방면의 저작이 넓은 관심에서 나왔음을 젊은이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제목을 다산 정약용 생가라고 해도 되지만, 굳이 ‘에서’를 붙인다. 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이 있기 때문이다. 감? 아무래도 다산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는 비결이 될 것 같아 그런다. 철학자를 이해할 때 감이 잡히면 쉽다. 감이 잡히지도 않는데도 어떤 철학자를 소개하다가는 나도 힘들지만 듣는 사람은 더 피곤하다. 

그러니까 어떤 철학자가 세상을 보는 눈, 사람에 대한 이해, 하고 싶은 말, 이것만은 안 되겠다고 뻐팅기는(버티는) 것, 아무리 위험해도 이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알면 그의 철학이 저절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건방진 이야기지만, 내가 본다기보다 그가 스스로 들어난다고나 할까? 그것도 손을 흔들면서, 웃음을 지면서. 

얼마 전 다산 생가를 학생과 함께 들르면서 나는 강조했다. 생가 언덕에서 보이는 그 시절 두물머리(양수리)의 풍광을 떠올려보라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그곳은 강원도와 충청도의 물산을 가득 실은 배들이 모이고, 뗏목을 이은 떼배가 물위에 넘쳐났을 것이라고. 하룻밤 묵어가는 장사치와 나무꾼이 득실거렸을 것이라고. 그래서 정약용은 어린 시절 뛰어놀면서 물류(物流)를 느꼈을 것이라고. 마치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 분기점 산 중턱에 집이 있는 것과 같았을 것이라고. 

물류를 영어로는 기호논리학을 뜻하는 ‘로지스틱스’(logistics)라고 쓴다. 요즘 영어로 쓰는 회사 이름 때문에 철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처음에는 자꾸 논리학이 떠오르다가 이젠 옛날식 ‘수송’(輸送)을 지나 ‘물류’로 들어온다. 군대 용어로는 병참(兵站)인데, 중국식 한자라서 뜻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런데 참(站)의 의미를 살리면 북경참(北京站)처럼 역(驛)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산 생가가 바로 참이 있던 곳이고 우리말로는 역전앞이었던 것이다. 두물머리에 말을 먹이고 사람도 묵어가는 마방(馬房)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방, 다름 아닌 모텔이다. 말이 쉬면 마방, 차가 쉬면 모텔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다산의 다방면의 저작이 바로 이러한 넓은 관심에서 나왔음을 젊은이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귀양시절에도 다산이 몇 년간 주막에서 머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일본서적을 강진만을 통해 입수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일반적이다. 해남의 토호인 윤씨와의 친분관계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다산의 어머니가 바로 해남 윤씨였다. 

혼자 쓴 글로는 다산의 것이 세계 최대라고 한다. 일단 그의 능력이 탁월했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지역의 문사(文士)들이 있었다. 다산 스스로 폐인(廢人)이 되도록 공부한다고는 했지만, 이는 거꾸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임을 반증한다. 그러니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위의 일표이서(一表二書)로 그의 저술이 대표되지만, 철학하는 우리로서는 그보다 사서를 비롯한 오경에 대한 경전해석학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비슷한 예가 있다. 대만에 머물던 중국철학의 거두였던 모종삼(牟宗三) 선생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제자들이 열심히 녹음해서 글로 풀어 원고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강의 후 시간이 좀 지나면 곧이어 책으로 나왔다. 나야 책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한탄이 오히려 떠오른다. ‘요즘에는 영웅이 없어!’ 

양수리는 양수참(兩水站)이었다. 보급, 정비, 회수, 교통, 위생, 건설 등의 일체의 기능을 지닌 병참(기지)처럼. 철학, 도심과 항만에서도 한다. 철학, 터미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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