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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 - 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1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 - 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1
  • 교수신문
  • 승인 2019.08.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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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아나키즘의 원조 붓다 “군대가 가는 쪽, 쳐다보지도 말라”
최초 아나키스트 고대 중국 허행
노자, 농민전쟁 평등사상의 기초 
장자는 도피적 지식인 사상으로

아나키스트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나키즘은 때론 ‘반문명적 반국가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색안경’에 의해 오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존재할’ 아나키즘의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늘 세상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며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 기본 사상은 세상과 문명을 유지하는 긍정적 축이다. 자연-자유-자치의 ‘3자’를 실천해온 아나키스트 박홍규 명예교수(영남대 교양학부)가 시공을 넘나드는 ‘아나키스트 열전’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것’을 추구한 노자는 아나키즘, 혹은 반문명의 철학으로 보아야 한다.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것’을 추구한 노자는 아나키즘, 혹은 반문명의 철학으로 보아야 한다.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즘의 역사를 다룬 국내 유일의 책인 프랑스 철학자 장 프레포지에(Jean Preposiet, 1926~2009)의 <아나키즘의 역사>에 의하면 최초의 아나키스트는 흔히 견유학파로 번역되는 키니코스학파의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440~336)와 디오게네스(Diogenes, 기원전412~323)다. 이어 중세로 넘어가 현대까지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설명하는데 모두 서양인이다. 세상에! 비서양에는 아나키스트가 없었단 말인가? 서양에만 아나키스트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면 아나키즘은 서양에 고유한 것이지 인류 공통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역사 이전의 선사시대에 존재한 원시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아나키적 사회였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고, 그 비슷한 성격의 사회는 현존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원시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인디언 사회는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232-233쪽)라고 말한다. 나도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원시사회나 인디언 사회만이 아니다. 미국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 1936~)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동북부의 고원지대를 조미아라고 하고 그곳에서도 최근까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존재했다고 <조미아>에서 밝혔다. 스콧에 의하면 조미아의 산악민들이 지난 2천 년 동안 노예제와 징병, 과세, 부역, 질병, 전쟁 등 평지의 국가 만들기 과업의 폭정에서 달아난 탈주자, 도피자, 도망노예들이고 하면서 중국이나 인도는 그들을 야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야만과 미개의 모습으로 규정된 그곳 소수민족의 탈주와 도피 문화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전략으로서, 그들의 이동식 경작방식인 화전농법은 국가와 지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대표적인 생계방식이었으며, 카사바, 감자, 고구마 같은 ‘도피 작물’은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원천이 되었다고 스콧은 주장한다. 이러한 야만이 바로 아나키로서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서양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개마고원이나 지리산이나 한라산이 한반도의 조미아였다. 

동양 아나키즘의 원조인 붓다(기원전624~544년?)는 조미아의 동북쪽 끝에서 태어났다. 아나키즘 이론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1842~1921)은 그의 <상호부조론> 결론에서 그가 주장한 아나키즘의 핵심인 상호부조의 원칙이 구현화된 것으로 원시적인 불교도의 커뮤니티를 들었다. 인도의 초기 승가는 “군대가 가는 쪽을 쳐다보지도 말라”, “칼 찬 자에게 설법하지 말라”는 붓다의 말에 충실했다, 행복과 무관한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제도인 국가와 자본주의가 압박과 고통을 낳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불교는 아나키즘일 수밖에 없으나, 기독교가 그러하듯이 불교도 권력과 부를 배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들과 결탁되어 타락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부정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불교 역사 2500여 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장자는 “나를 더럽히지 말라.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더러운 도랑에서 헤엄치며 놀겠다”고 했다.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장자는 “나를 더럽히지 말라.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더러운 도랑에서 헤엄치며 놀겠다”고 했다.

허행

현대 미국의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버(David Graver, 1961~)는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아나키즘의 역사를 말하면서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고대 중국의 허행(許行)과 농가(農家)를 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운동은 상인들과 정부 관리들을 쓸모없는 기생충으로 여겼고, 오직 솔선수범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경제는 큰 국가들 사이의 소유자가 없는 영토 내에서 민주적으로 규제하려고 했다. 명백하게 이 운동은 이러한 자유촌락으로 도망쳐온 지식인과 농민 사이의 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점차 주변의 왕국으로부터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주변 왕국들의 침략의 빌미가 되어 결국 그들이 붕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대규모 망명을 장려하는 것은 고전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전략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이념은 후세대의 공식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대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은 개인은 어떠한 사회적 관습에 매여서는 안 되며 상상의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기술은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주었다. 이 경향은 역사 속에서만 반복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자들과 원시주의자들의 이상은 차례로 노자와 장자의 도교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211쪽)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는 허행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맹자(기원전372~289)의 언행을 적은 <맹자>의 ‘등문공 상’에서 맹자를 만난 진상(陳相)이 허행도 만났다고 말하니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국(戰國)시대 사람인 것 같다. 그를 중심으로 한 농가는 제자백가 중 하나로 농사를 가르치고 스스로 농사를 지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실행했다. 허행이 태어난 초(楚)나라는 당시 중심 문화권 밖에 있어서 그 문화권에게 받는 피해가 컸으므로 허행은 통치자가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산물을 가질 권리가 없고, 따라서 백성의 농산물도 뺏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맹자>에서 허행을 추종하는 진상이 맹자에게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음식을 끓여 먹으면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맹자는 분업 체제 하에서 농민은 임금을 먹여 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박한다. 즉 맹자는 통치자인 대인의 일과 피치자인 소인의 일이 다르고 그것이 천하의 보편적 질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진상의 답은 <맹자>에 적혀있지 않지만, 그가 분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게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은 그가 뒤에 이중가격 등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그러자 맹자는 다시 물건의 질이 똑 같지 않으니 가격도 같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서도 진상의 답은 적혀져 있지 않는데, 이미 앞의 말에서 진상은 같은 원료의 물건이면 값도 같아야 한다고 하여 질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았고, 같은 질의 물건에 대해 값이 차이가 나는 점을 비판한 것이므로 맹자의 비판에는 문제가 있고 궤변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여하튼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농업이나 수공업)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하고,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는 각자의 소유에 귀속시켜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허행이 주장한 반면 맹자는 통치자와 피치자의 계급과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맹자>의 기록만이 남아있는데, 그것만을 보는 한 그레버의 설명을 옳다고 보기 어렵다. 허행은 소국에서 대국으로 갔고, 임금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임금도 일반 백성과 같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나키스트의 시조라고 보기도 하는 노자(기원전601?~?)가 농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그레버의 설명에는 그들의 생몰연대를 보면 문제가 있다. 장자(기원전369?~286?)도 맹자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 물론 노자나 장자의 생몰연대도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레버의 설명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김용옥은 <맹자 사람의 길>에서 허행은 “맑스가 말하는 원시공산주의의 사회를 지향하는 어떤 이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직경을 주장하며, 소득의 분배를 균일하게 하며,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사용가치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상, 330-331쪽)고 하며 ‘촌놈’이라고 평가한다. 김용옥이 허행을 “촌놈”이라고 하는 이유로 김용옥은 현대 사회에서 재벌 회장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김용옥이 과거에 대우라는 재벌의 회장이었던 김우중과 나눈 <대화>라는 책에서 김우중을 두고 “이렇게 정직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존경한다고 말한 바를 생각나게 한다. 김용옥 정도는 아니지만 허행이 통치자를 부정했다고 하면서 경솔하다고 비난하는 윤재근 같은 학자들이 대부분이다.(<맹자1>, 1059쪽) 통치자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행은 통치자를 부정한 적이 없다. 

<맹자>는 성리학에 의해 중시되어 ‘사서삼경’의 하나로 들어간 뒤 고려 말부터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널리 읽혀왔으나, 허행을 주목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19세기말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면서도 허행을 주목한 사람이 없다. 중국인 허행을 우리의 새로운 아나키스트 원조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맹자>를 널리 읽어온 동아시아의 정신풍토를 감안하면 그를 그렇게 감안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

그레버의 주장과 달리 종래 고대 중국의 아나키스트로는 노자와 장자가 회자되어왔다. 가령 노자는 <도덕경> 80장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것’을 추구했음을 아나키즘/반(反) 문명의 철학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봄은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열 사람, 백 사람이 쓸 수 있는 도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 가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병기가 있지만 벌여놓을 일이 없다. 백성들이 끈으로 매듭을 짓는 결승문자를 사용하고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고, 풍속을 즐거워한다. 옆 나라에서 닭과 개의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의 행동을 백성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그렇게 하게 한다면(그런 식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를 아나키즘으로 볼 수 없다. 이를 국가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전체주의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 증거로 법가가 도가사상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점을 들 수도 있다.  

<도덕경>에 대한 한반도 최초의 주해서는 이이(李珥, 1537~1584)의 <순언>(醇言)이었지만 소국과민에 대해서는 주해하지 않았다. 소국과민에 대한 최초의 주해는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이었는데, 그것은 주희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식으로 주해한 것이었고 그 뒤에 이어진 주해서들도 마찬가지로 유교식이었다.      

<노자>의 ‘소국과민’은 <장자>에서 ‘지덕지세’(至德之世)로 나타났다. <장자> ‘거협’ 편에서 신농(神農) 등의 신화시대에 “백성은 밧줄의 매듭을 기호로 썼고 그 식사를 맛있게 여겼으며 그 옷을 훌륭하다 생각했고 그 풍속을 즐기며 그 집을 편안하게 여겼다. 이웃 나라가 바로 앞에 보이고 닭이나 개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였지만 백성은 늙어죽을 때까지 오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대야말로 가장 잘 다스린 시대다.”라고 한 것은 <노자> ‘소국과민’의 반복이었다. 

<도덕경>이 어지러운 전쟁 시대에 처한 지배자의 통치방법에 대한 책인 반면 <장자>는 사적인, 즉 비정치적인 개인이 그런 전쟁 시대에, 또는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는 점은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왔다. 그래서 노자가 아닌 장자를 아나키스트로 보기도 한다. 그 근거로 사마천의 <사기>에서 초나라가 장자를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그가 “나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고 한 것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노자도 국가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장자도 유가가 주도한 한나라 이후의 중국에서 노자처럼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 

<노자>에는 사회 개혁을 위한 실천적 제안은 없지만, 당시 유가가 지지한 신분제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있고, 인민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고 무의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라는 주장이 있지만, <장자> ‘지락’(至樂) 편에서는 “죽으면 위로 군주가 없고 아래로 신하가 없다”고 했을 뿐이고 <장자> ‘덕충부’(德充符) 편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서 이것에 안주하고 명에 따르는 것은 오직 유덕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장자는 인간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시비, 선악, 귀천, 빈부, 회복, 생사 등을 초월하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고 살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노자는 한대 말기의 태평도나 오두미도와 같은 농민전쟁의 평등사상이 되기도 했지만, 장자는 죽림칠현과 같이 도피적인 지식인의 사상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쿠라하라 고레히도(藏原惟人, 1902~1999)는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에서, 노자에게는 무위자연 사상과 사회경제사상이라는 양면이 있는데 장자는 전자를, 허행은 후자를 계승했다고 보았다. 쿠라하라에 의하면 장자는 위험하지 않아 후세에 남았지만 허행은 위험하여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임금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니 허행의 사상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쿠라하라는 허행을 아나키즘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의 원류로 보지만 허행을 그 둘 중 어느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김용옥이 허행과 맑스를 연관시키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아나키즘이란?

인류의 희망…언제 어디서나 생기는 보편
계급제, 불평등, 폭력과 전쟁 등이 항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는 것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특히 전쟁에 의한 평화나 상향식 명령에 의한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보다 쉽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권력에 의한 강제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함께 살면서 서로 돕고 평화롭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사상)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를 손문의 삼민주의나 조소앙의 삼균주의처럼 자유-자치-자연의 삼자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과 조화롭게 추구하는 운동인 아나키즘은 인류 공통의 희망으로 언제 어디서나 생겨나는 보편이다. 특히 노예제와 계급제, 불평등과 차별, 폭력과 전쟁 등이 항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나키즘은 맑스주의와 공통점을 갖기도 하지만 맑스주의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특히 전쟁에 의한 평화나 상향식 명령에 의한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권력에 의한 강제 중 가장 참혹한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자유와 평등, 평화와 자연을 파괴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고 자신도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사문화를 찬양하는 자들이 있다. 

꼭 적과 싸우는 전쟁만이 아니다. 일상의 삶을 비참한 투쟁으로 만드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아나키즘은 저항한다. 가정과 학교, 기업과 사회도 군대식의 계급구조와 상명하복문화가 지배하는 점에 아나키즘은 반대한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입각한 민주적인 가정, 그리고 자유학교나 ‘학교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 또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중시하는 민주적 기업, 나아가 간접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정치를 요구한다. 

아나키즘은 일찍부터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모든 개인의 자결(자기결정)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결을 존중했다. 따라서 식민지하에서 아나키즘이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제강점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문제가 된 김원봉은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의 단장인 아나키스트로서 신채호에 의해 유일하게 진정한 독립군으로 찬양되었으나, 해방 후 근본주의적인 광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희생되었다.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번진 신자유주의와 결탁된 소위 글로벌리제이션이 거대자본의 세계독점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2012년 월스트리트점거운동을 비롯한 아나키즘의 세계정의운동은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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