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19 11:40 (화)
애인보다 더 좋은 수업
애인보다 더 좋은 수업
  • 김찬호 연세대
  • 승인 2003.09.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강의시간

김찬호 (연세대, 사회학)

내가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내가 강의에 임하면서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것은 강의에 뛰어난 명강사들이 아니다. 다름 아닌 여러분들의 애인들이다. 당신들이 자기 애인과 함께 있는 것보다 내 강의를 듣는 것을 더 즐거워 하도록 만드는 것이 내 목표라고 나는 선언한다.

실제로 나는 그러한 각오로 강의를 준비하고 학생들을 만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정황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들의 고민, 정서적인 상태, 세계에 대한 이미지, 정보 체계 등을 섬세하게 포착해 학문의 세계에 접목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10년 이상 ‘문화인류학’이라는 강의를 진행해온 나는 금년에 들어와서 새로운 강의 하나를 개발하고 있다. ‘지구촌 시대 문화인류학’이라는 비슷한 강좌다. 전자가 인간의 본성과 문화적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과목이라면, 후자는 숨 가쁘게 진행되는 지구촌화를 문화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과제와 해결 방안을 찾는 과목이다.

그런데 너무나 복잡다기하고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현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무엇보다도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테크놀로지, 미디어 연구 등 여러 학문에 대한 기본 이해를 전제로 하기에 수험 공부와 취직 공부에만 매달리는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버거운 내용이다.

나는 그 모든 논의의 출발점을 학생들 자신에게서 찾고자 한다. 그래서 수강생들끼리 조를 편성해 논의한 내용을 각 조별로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올리면, 그것을 다시 모아 쟁점을 잡고 학문적인 논의로 수렴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강의의 뼈대를 이루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지구촌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들은 무엇인가? - 이를 통해 학생들은 관심사나 전공 그리고 사회적 입지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세계의 변화를 포착하는지를 서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주 잡다하고 사소한 일상적 경험들 속에 세계의 거대한 작용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2)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지구촌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지금의 이 사회 변화를 환영하는가, 아니면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까닭은? - 대부분의 학생들은 변화가 두렵다고 한다. 그런데 토론을 하다 보면 그 가운데 일부분은 막연한 두려움 또는 잘못된 사실이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두려움의 경우에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기보다 한국 사회 자체에 있는 것이 많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다.

(3) ‘지구촌화’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 이를 통해 수강생들이 어느 한 쪽 면에만 치우쳐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한다. 그리고 지구촌화가 최근에 들어서 갑자기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인류 문명 초기부터 꾸준하게 진행되어온 사회 현상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와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동안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들(예를 들어 몽고의 역사나, 신라와 이슬람과의 교류 등)에 대한 관심도 환기시킨다.  

(4) 이러한 지구촌화가 일으키는 기회와 문제는 무엇인가? - 한편으로 삶의 반경과 상품 및 정보의 선택폭이 넓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불평등 심화, 환경오염, 민족주의와 테러리즘 등이 만연하는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그리고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문화적인 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강의가 마무리된다.

 10년 전부터 대학생들은 다양한 경로로 외국 체험을 해왔다. 배낭여행, 어학연수, 교환 학생, 해외 연수 프로젝트 공모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타문화의 벽을 두드린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공부하거나 활동하는 외국인들과의 만남도 점점 잦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들은 지식과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어 공부를 엄청나게 하지만 서양 사회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고 무엇보다도 자아와 한국 문화에 대한 성찰이 깊지 않아 의사소통 능력의 신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지구촌 시대 문화인류학’이라는 강좌를 통해 그러한 단절을 메우면서 보다 풍요로운 삶과 세상을 기획해가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