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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 교수신문
  • 승인 2019.07.2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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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로 축적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

저자가 전작 ‘인류 3부작’을 통해 던진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다.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한 뒤 이제 스스로 신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는 대서사는 불가해한 세상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탁월하고 대담한 이야기로 각계각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 책은 ‘우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전, 하라리가 역사 속 ‘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기 위해 하라리가 주목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 군인들이 남긴 회고록이다. 그들의 회고록은 17세기 중앙집권적 근대국가가 등장하기 전 역사와 개인사 이의 긴장 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이 회고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구색을 갖춘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과관계로 이어진 이야기라기보다 제각각인 에피소드의 건조한 나열이고, 독자를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은 채 독자의 기억에 남으려 하고, 역사적 사건과 자전적인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알쏭달쏭한 글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당대 진실성의 원천이 목격 등의 경험보다는 귀족의 명예에 더 기대었다는 점을 들어 ‘진실한 목격담’ 가설을 논파한다. ‘믿을 만하다’는 말은 명예와 동의어였으며, 진실은 목격자가 아니라 명예를 지닌 귀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실은 르네상스 시대 군인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 전사 귀족이었다. 귀족이 아니면 역사 속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었고, 정체성도 빼앗기고 말았다. 

 


명예의 동등함 원칙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예로운 행동을 한 사람은 누구나 동등한 처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급 군인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귀족이나 왕과 동등한 위치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일반 병사로 군 복무를 시작해 중급 지휘관까지 올라간 페리 드 귀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자신이 역사 속에서 동등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나는 발랑시엔에 한동안 남아 있었고, 황제는 브뤼셀로 떠났다”(20쪽)처럼 황제와 자신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동등하게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력의 내재적인 가치를 역사적 맥락에 우선하는 역사 인식으로 인해 르네상스 회고록은 명예로운 행동을 일화 중심으로 건조하게 나열한 사실의 기록이 되었다. 자연히 하라리가 ‘왕조-민족의 위대한 이야기’라고 이름붙인 근대국가의 중앙집권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왕조, 민족, 국가를 중앙에 둔 역사는 인과관계에 따라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 따라 중요한 순서대로 사건들이 재배열되고 나면, 카를 5세는 귀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 된다(316쪽).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이 묘사한 역사적 현실은 그런 인과관계와 영향력을 무시함으로써 왕조-민족 이데올로기를 위협한다.


하라리는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이 역사적 현실을 묘사하는 방식을 역사와 개인사의 동일시로 고찰한다. 일화 중심적인 역사는 기록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며, 언제라도 추가할 수 있게 결말이 열려 있다. 각자가 인과율의 억압 없이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다면, 삶 또한 의미를 가지며, 닫히지 않을 것이다. ‘왕조-민족의 위대한 이야기’는 개인사는 분리되어 떨어져나간 ‘우리’의 역사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은 역사와 개인사가 일치하는 ‘나’의 역사다. 물론 당대 회고록 저자는 귀족 남성으로 정체성이 한정되었고, 역사의 내용은 명예로운 행동으로 국한되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역사와 개인사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잣대로는 손색이 없다. 허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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