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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어떻게 자살하나
지식인, 어떻게 자살하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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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의무가 될 때

 

자살을 죽음의 한 형태로 인정할 때 지식인들의 자살은 종종 참고사항이 된다. 의식수준이 높고 자율성이 강한 이 집단의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자살도 자살 전의 고통의 성격이나 강도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니체와 헤밍웨이는 정신병적 스트레스의 극한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죽이고 10년후 자신도 자살한 알튀세르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울프 家의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키운 우울증이 심해져서 목숨을 끊었다. 알튀세르의 제자인 정치학자 풀란차스도 자살했다. 알튀세르가 거느린 죽음의 그림자는 만만치 않다. 벤야민은 유태인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다가 실패해서 다량의 모르핀을 마셨다. 여기엔 나치에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는 순결의식이 작용한 것 같다.

한국의 경우, 일제시기 매천 황현이나 민영환처럼 國恥에 대한 선비의 책임감으로, 친일지식인 윤치호처럼 해방후 양심의 뉘우침 때문에 자살하기도 하는 등 시대적 이유가 강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처럼 자유연애에 대한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해 현해탄에 몸을 던진 낭만적 자살도 결국 비슷한 유형이다.

그리고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자살을 부르기도 한다. 월북 과학자 김봉한은 자신의 '봉한학설'이 정부와 사람들에게 버림받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경우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한 원로교수가 자신의 고고학 유물 발굴업적에 학계가 의혹의 시선을 던지자 "목숨을 걸고 항의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맸다.

학자들에겐 때로 명예라는 것이 전부일 때가 있다. 성폭행 사실이 드러난 신부들이 자살비율이 높은 것처럼, 비리와 연루된 지식인들이 종종 자살을 택해왔다. 공금 횡령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정 아무개 교수의 자살이 그렇다. 정 교수는 "나는 결백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연구실에서 목을 맸다. 사학비리에 저항하다가 폭행을 당하고, 동료교수들이 무더기로 해임을 당해 괴로워하다가 결국 빌라에서 뛰어내린 故 신현직 계명대 교수(공법학)의 경우도 학자에 걸맞은 삶을 지탱해나가기 힘들어 생의 포기에 이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지식인의 자살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살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서울대의 시간강사가 연구부진과 신변을 비관해 산에서 목을 맸다. 지난 5월에 삼일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故 윤종혁 홍익대 교수(영문학)의 경우는 아들의 말에 따르자면 치매에 따른 신변비관이었다. 학문적, 실존적 이유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으로 처한 어려운 상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좀 지난 일이긴 하지만 故 최욱경 덕성여대 교수(미술)처럼 동료교수와의 불화로 인한 우울증이 심해져서 자살한 사례도 있다.

그렇지만 지식인의 자살은 한 개인의 이성적 선택, 적극적 행위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철학자들은 들뢰즈의 죽음을 "삶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해석하려는 극단의 모험"이라고 바라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실제로 그의 죽음은 미궁에 싸여 있다. 유서도 없고, 자살방법도 투신이라 그 충동성을 의심받고 있다.

볼테르는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잃고 희망마저 없을 때, 삶은 치욕이고 죽음은 의무가 된다. 야만인은 자살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재기 있는 인간만이 자살한다." 자살이 인간의 조건에 충실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시각이다.

최근 한 칼럼에서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한 사회에는 체력이 약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심성이 여린 사람들 또한 있기 마련이며, 자살자의 내면을 휩싸는 억울함 혹은 소외의 감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것은 자살자를 모욕하는 일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살을 지나치게 병리적 현상으로, 사회적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 또한 죽음에 대한 성숙한 이해는 아닌 듯하다. 특정 개인의 사건보다는 자살이라는 추상적 인간행위에 초점을 맞춘 공적담론을 늘려나가는 게 자살에 대한 충격에서 우리 사회가 점차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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