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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없으면서 있다. 사리탑으로…다시 묻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성철스님은 없으면서 있다. 사리탑으로…다시 묻는다, 죽음이 무엇인지.
  • 최재목 교수
  • 승인 2019.07.01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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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불교에서 ‘無의 덤’을 생각하다”

그런데 왜 하필 붓다를 음역할 때 ‘뜰 부, 죽일 도’ 자를 조합하여 부도(浮屠)로 했을까. 이런 저런 의문이 들어 찾아보니, 『조정사원(祖庭事苑)』의 부도(浮屠) 항목에 간명한 해답이 있다. 참고로 『조정사원』은, 송의 목암선경(睦庵善卿) 스님이 『운문록』등의 선종 관련 도서에서 숙어 2,400여 개를 채록하고 그 전거를 제시하여 주석을 보탠, 8권으로 된 사전이다. 조정(祖庭)이란 조사가 머무는 뜰로서 ‘선종’을, 사원(事苑)이란 ‘사전(事典)’을 뜻한다.『조정사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浮圖: 불(佛), 탑(塔), 승(僧)

 

범어로 불타(佛陀. Buddha)이다. 혹은 부도(浮圖)라 하며, 혹은 부다(部多)라 하며, 혹은 모타(母馱)라 하며, 혹은 몰타(沒陀)라 한다. 모두 오천축(五天竺. 고대 인도의 동·서·남·북·중 다섯 나라)의 말이다. 지금은 아울러 각(覺)이라 번역한다. 도사(道士) [장융張融이 지었다고 말해지는]의 『삼파론(三破論)』에는 “불(佛)은 옛 경본(經本)에는 부도(浮屠)라 한다. 나집(羅什)이 불도(佛徒)라고 고쳤다. 그 글자의 본원[源]이 나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서[詔]를 내려서 부도(浮屠)라고 한 이유는 호인(胡人)(=인도인)이 흉악한 때문이다. 노자(老子)가 그들을 교화시켰는데, 그들이 처음엔 신체[形]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 머리를 깎았다. 하물며 베어서 죽이기까지야 했겠는가?” 석순법사(釋順法師)가 말했다. “경(經)에 이르기를 부도(浮圖)란 것은 범어(梵語)이다. 혹은 ‘장래 성천자(聖天子)가 될 상서로운[聖瑞] 신령스런 도상[靈圖]’이라 할 것이 바다에 떠서 이르렀다 하여 부도(浮圖)라고 이른다. 오(吳) 나라 가운데의 석불(石佛)이 바다를 건너 갑자기 오게 된 것이 바로 그 일이다. 지금 자네가 도상(圖像)의 도(圖)를 폄훼하여 형벌의 죽임[屠]의 도(屠)로 한다면, (중략) 비슷하나 아닌 것이거나, 아니면서 비슷한 것이다. 외전[外書]에는 중니(仲尼)를 성인으로 삼지만, 내전[內經]에는 ‘(중니의) 니(尼)란 여자[女]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중니(仲尼)가 여자이다’라고 한다면, 자네가 어찌 그것을 믿겠는가. 오히려 도(圖. tu)와 도(屠. tu)라는 글자가 (뜻이 아니라 발음 상) 서로 유사하듯이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용문에서 보듯이,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도(屠. tu)는 도(圖. tu)와 발음이 같으나 어느 쪽이든 음역을 한 것이라서 뜻을 새겨서는 안 된다. 마치 한자 뜻을 가지고서 부도의 도를 이해하는 것은 ‘중니(仲尼)’의 ‘니’를 여자[=여승, 비구니]로 새기는 것과 같은, 사이비 해석을 하는 꼴이 된다. 한 마디로 부도(浮圖)든 부도(浮屠)든 붓다의 음역이니 의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리탑=부도’는 무언-침묵의 가르침

 

사람은 살아서는 ‘나’를 로고스의 공간에서 보여주려 하나, 죽어서는 ‘나’가 카오스의 공간에 숨는다. 로고스는 정상 쪽으로 높아지려 하는 방향에서, 카오스는 지하바닥의 굴속으로 묻히는 방향에서 의미를 갖는다. 

살아있는 역사적 공간은 상대적 세계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시간의 파도에 깎이어 결국 흔적을 지워간다. 끝내 침묵과 고요라는 영원, 절대의 세계로 간다. 그 세계는 무덤이라는 표식으로 대지 위에 기억된다. 우리는 상대적 세계에서 살다가 죽어서 절대적 세계로 간다. 적멸보궁. 그런데 그(적멸보궁)의 건축술의 기하학적 형식은 구상적 세계가 아니라 추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절대는 구상 속에서가 아니라 추상 속에서 살아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사람은 죽어서 두 가지로 분해된다. 정신의 ‘넋[魂]’과 육체의 ‘얼[魄]’이다. 넋은 소문?칭송 같은 ‘명성’으로 허공에 남아 떠돌고, 얼은 백골을 껴안은 ‘무덤’이라는 물질적 형식으로 땅에 남는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서, 넋의 이름인 ‘명성’과 얼의 이름인 ‘무덤’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남긴다. 스님들이 남긴 ‘사리-사리탑-부도-부도탑’은 일단 얼이라는 이름이나, 그것은 분명 역사적인 몸(化身, 應身)이 아닌 진리의 몸(法身), 절대의 몸을 상징한다. 붓다나 큰스님들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스투파)은 그 자체로 그분들(붓다, 큰스님)의 법신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붓다가 부도이고, 부도탑이 붓다인 것이다.

성철스님 사리탑가는 길 (최재목)
성철스님 사리탑가는 길 (최재목)

사리탑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며, 속되지 않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산 자들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 오직 죽어서만이 다가설 수 있는, 거룩한 아득히 먼 곳이다. 따라서 그곳은 묘역(墓域)인 동시에 절대적 무언과 침묵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르침을 전해주는 교학(敎學)공간이다. ‘묘’와 ‘학’은 이렇게 밀접하게 붙어있다. 유교에서는 성현을 모신 사당[=廟]과 강학당[=學]의 배치를 ‘묘→학’으로 또는 ‘학→묘’로도 배치되긴 하나, 역시 그 기준점은 ‘묘’이다. 묘(廟)이든 묘(墓)이든 죽은 자가 산 자를 호출해내고, 줄 세우고, 가르치는 형식이다. 그곳에는 그 누군가가 ‘죽었지만 살아서’, 오히려 그래서 더 확대된 ‘큰 바위 얼굴’ 같은 성스러움, 위대함, 모범성을 자랑한다.   

묘(廟, 墓)는 죽은 자들이 자리한, 그래서 성스러워진 엄숙한=고요한=신성불가침의 절대공간이다. ‘종교’는 ‘종’(宗. 절대적인 것)과 ‘교’(敎. 가르침)의 합체 아닌가. ‘종’은 그 자체로서 ‘교’의 의미를 갖는다. ‘안 계시지만’ 무언과 침묵으로서 ‘계신’ 그 의미. 성철스님도, 안 계시지만 사리탑이라는 무언, 침묵의 형식으로 가르치며 계신다.

성철스님의 사리탑은 조형면에서 다른 것과 좀 다르다. 이 사리탑은 열반 5년 뒤, 1998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라는데, 내용이 궁금해서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의 건립설명문을 잠시 읽어본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이란 글 밑에 <나를 찾아가는 禪의 공간>이란 제목이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바로 이 대목에 눈길이 멎는다. ‘사리탑’은 역시 ‘선의 공간’ 즉 배움의 터라는 인식이다.

성철스님 사리탑 (사진=최재목)
성철스님 사리탑 (사진=최재목)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정·혜 삼학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스님의 열반 5주기에 회향 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살아 있는 선(禪)의 공간이다.”

성철 스님은 사리탑으로 살아서 계신다. “자기를 바로 보라! 자기를 바로 보라!”고 하시며, 여기 안 계시면서 여전히 계신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무덤, ‘無의 덤’이라는 형식의 은유 

 

우리는 왜, 죽음을 으슥한 곳, 깊은 곳, 보이지 않는 곳, 산속으로 자꾸 내몰고 있는가? 그런 축출과 배제의 역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 삶이 팍팍해서? 아니 우리들의 삶이 죽음보다 더 위대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삶과 죽음을 준엄하게 구별하기 시작했다. 다시 그것을 온화한 것과 차갑고 무서운 것,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으로 차별하고, 그런 다음 다시 후자(=차갑고, 무섭고, 추악한 것)를 삶의 세계로부터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 못된 인식론적 프레임은 어딘가 꼬일 대로 꼬여있다.

죽음은 삶의 저쪽에 있지 않다. 이쪽, 여기에 있다. 삶 속의 안 쪽에, 삶 속에 동거해 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저쪽이라고 눈길을 돌린다.  

무덤은 ‘덤’이다. ‘무(無)의 덤’이다. 맨 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챙기듯, 죽어서 흩어지지 않고 여기서 살았다는 표식 하나를 얻었다. ‘무(無)’에서 ‘덤’으로 얻은 것. 삶의 산자락에, 달빛을 닮은, 꽃 한 송이 피운 것이다.

 

3. ‘법정스님 계신 곳’을 찾다: 이 풍진 속의 ‘무소유, 자유’

 

* 이하의 내용은 성철선사상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고경』07(2018 Vol.63)-08(2018 Vol.64)에 실렸던 글을 수정하여 연재함을 밝혀 둔다.

 

‘무소유, 방랑, 자유’란 어휘 앞에

박홍규 교수(영남대)가 쓴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 - 자유를 위해 반항하라』(열린시선, 2008)를 읽었다. 그 속에 <법정 스님과 사르트르>라는 대목이 있어 흥미로웠다. 저자는 ‘무소유, 방랑, 자유’라는 공통분모가 되는 키워드를 두 사람에게 찾아내려 애쓴다. 하지만 삶의 행태에서 “법정스님과 사르트르 사이에서 아무리 비슷한 점을 찾으려고 해도 역시 다르다”(48쪽)고 말한다. 아울러 솔직한 의견을 보탠다. “법정스님이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탁발승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언젠가는 서울 부근의 어느 절의 주지가 되었다고 해서 의아해 한 적이 있다. 반면 사르트르는 언제나 결코 어딘가에 고정되어 머물지 않은 영원한 탁발승처럼 살았다. 구걸만 안했다 뿐이지 떠돌이 중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35쪽) 나는 차라리 법정스님이 소로우 아니면 격이 다르긴 하나 스피노자에 대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월든 호숫가의 법정스님

 

법정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 숲, 2008)라는 책 가운데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에서 소로우가 살았던, 콩코드시에서 남쪽으로 2킬로 정도 떨어진 곳의 월든 호수와 오두막집 이야기를 적고 있다. “월든에 다녀왔다. …호수의 북쪽에 150여 년 전 소로우가 살았던 오두막의 터가 돌무더기 곁에 있다. 거기 널빤지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한번 내 식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즉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인생이 가르치고자 한 것을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소로우’”(137-8쪽) 아마 스님에게 감명을 준 구절이었으리라. 20년 전 필자도 케임브릿지시에 머물 때 가족과 함께 월든 호수를 두 번 찾아 그다지 크지 않은 맑은 호수에 발을 담그고 소로우의 간소한 삶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월든호숫가 소로우의 통나무집 모습 (사진=최재목)
월든호숫가 소로우의 통나무집 모습 (사진=최재목)

이어서 스님은 「다시 월든 호숫가에서」에서도 다시 월든 이야기를 적고 있다. “월든으로 갔을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고 책은 한권도 저술한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 말고는 그를 알아볼 사람도 없었다. 월든 호숫가에서 지낸 이 기간이 소로우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시기였다. 그 이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정스님에게 소로우는 제법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어쨌든 ‘무소유, 방랑, 자유’이런 어휘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머리로 생각해봄직한 것들이리라. 생애의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는 아니라 하더라도, 실천에 옮기기가 그리 쉬운 말들은 아니다. 누군가가 세속의 때가 묻은 나더러, “당장 그렇게 살아보라!”고 권한다면, “아?, 잠시만요!” 하고 ‘정신적 경련’(mental cramp)을 겪지 않으리란 확신도 없다.

 

문득 마주한 ‘청졸’(淸拙)

 

마침 ‘법정스님 계신 곳’으로 가기 전날 문득 책상에 앉아 있다가 『조정사원』을 아무데나 펼쳤다. 운 좋게도, 그 때 턱 마주친 단어가 <한적할 ‘청’(淸), 질박할 ‘졸’(拙)> ‘청졸’(淸拙)이다. 어쩐지 이것이 법정스님을 표현하는 말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악(潘岳. 247?300, 서진(西晉) 사람)의 ‘한거부’(閑居賦) ‘서’(序)에서 말한다. “졸(拙)이란 것은 총애와 영광[寵榮]의 일에 대한 뜻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집 짓고 나무 심고서, 소요(消搖)하며 자득(自得)하는 것, 이것이 청졸(淸拙)이다.”

청졸은 한마디로 ‘한적하면서[淸] 질박함[拙]’이다. 자연에 기거하며, 세속의 번잡한 일들을 끊고, 오두막집이나 짓고 나무나 심으며 소요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에서 의미를 찾는 생활을 말한다. 즉 소유가 아닌 ‘존재’(=무소유)로, 구속이 아닌 ‘자유’로 향한 라이프스타일을 말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자유’의 삶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대중을 위해서라면 ‘말에 기대서’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연 ‘무소유, 방랑, 자유’가 어디까지, 얼마나 가능할까. 주위로부터 법정스님의 홀로 사는 삶과 까다로운 성격, 문필가적 면모를 둘러싼 이런 저런 평가를 듣기도 한다. 입만 벙긋 하면 어긋난다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나 중국 당대?송대에 만들어진 용어 ‘불립문자’(不立文字)니 ‘염화미소’(拈花微笑)에 올인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하듯 싸악 문자들을 태워버린다면 이 세상이 한결 좋아질까, 불법(佛法)에 대한 대중들의 다양한 눈높이, 진리에 대한 난청(難聽), 낮은 해상도(解像度)의 시력은 또 어쩌랴.

선방에서 참선만 하는 분들은 펜대 굴리는 문필 작업을 아주 우습게 알 수도 있으련만. 나는 문자사리(文字舍利)를 진실을 드러내는 고귀한 매개로 본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이 필요한 경우, 당연히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의언진여(依言眞如) - 진여도 세속에 다가가서 읽히려면 ‘말에 기대서’, ‘말로써’ 나직히 천천히, 나긋나긋 조곤조곤 알기 쉽게 설명되어야 마땅하리라. 꼭 그래야 한다. 대중들을 위해서라면 ‘말에 기대서’라도 함께 저 언덕[彼岸]으로 가야하리. 그래야 대중들도, 스님들을 따라서, 불법의 정수리[頂]에 오르며 미끄러져 내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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