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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4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4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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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서 함께 보낸 날들, 마음을 엿보다
 내가 오기창님에게 박정희의 P자도 폴리틱스의 P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던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한 소리는 아니었다.

세브란스의대 강당 에비슨관에서 열리는 선생님의 일요일 집회가 한창일 당시에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38선을 넘으시어 오류동 송두용 선생님 댁에 기거하실 무렵 선생님의 생활을 여러모로 도와주신 분 중에 노연태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외항선의 선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다 동경에 들르는 일이 있으면 당시 패전직후의 일본 동경대학 총장을 하고 있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선생을 찾아뵈었다던 이야기가 대단히 흥미있어서 기억에 남아있다.

야나이하라 총장에 관해서는 이미 한번 언급한 바 있는데, 일제하에 동경대학 학생과장을 지내신 분이었고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선생님의 수제자였던 분이다. 소위 세계 2차대전의 전초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하나님은 중국 5천년의 거만을 면도칼 같은 일본 너로 하여금 증치하고 계시거니와 지금 철딱서니 없이 면도칼 역할을 하는 일본 너의 운명은 장차 어찌되려고 이렇게 까부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42년에 동경대학에서 해직되었다가 일본이 패전한 직후에 일본 동경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영입되었던 분으로서 함 선생님과는 우찌무라 선생의 일요일 성경연구집회에서 함께 우찌무라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정을 돈독히 하고 있었던 사이였다. 패전직후의 동경대학 총장이 되어서 그를 만나려면 적어도 두서너 달 이전에 면회신청을 해도 좀체로 시간을 할애받기가 어려웠다는 그 시절에 노연태 씨가 한국의 함석헌 선생의 이름을 대고 면회신청을 하면 즉시로 면회가 허락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단히 신기하게 생각되어서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무렵에 그리스도 교회의 안형주 목사님을 여러 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안형주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나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일관계가 몹시 불편했던 자유당 정권시절에 안 목사님께서 한번 함 선생님을 찾아 뵙고 ‘일본의 친구되시는 분들과는 어째서 그렇게 소식을 끊고 계시느냐’라고 질문을 했더니 선생님 말씀이 ‘글세 친구라는 입장에서라면 백 번 내가 잘못하고 있는 짓이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 편지라도 쓰려면 지금이 못난 우리나라 꼴을 이야기 안 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 노릇하기 싫어서 아예 소식을 끊고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더욱 선생님께 머리가 수그러질 수밖에 없었다는 안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선생님의 애국심이라 할까 선생님의 인품의 한 단면이랄까 여하튼 선생님에 관해서 소중하게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일화다. 일제시대 그 어려운 때 사귀었던 그런 친구들한테도 내나라 못난 꼴 말하기 싫어서 편지도 안 하신다는 선생님이 미국 땅에서 내 나라의 몰골 사나운 꼴을 말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는 오기창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워싱턴 디․씨에 돌아오시기 전까지 나는 소위 AID에서 지정해준 미국연방정부 소속인 미국 표준국 중앙연구소에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이렇게 어영부영 한 일년 지내고 나면 이 정권 들어서면서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그야말로 사진 찍으러 미국에 온 꼴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하고 있었던 터에 다니고 있었던 연구소 안에서 업무가 끝난 다음에 대학원 강의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소속하고 있었던 과의 과장으로 있었던 리오 월(Leo Wall)박사가 워싱턴 디․씨에 있는 죠지 워싱턴 대학과의 협정으로 매주 두 번씩 업무 후에 ‘고분자 물질의 열분해’라는 제목으로 대학원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 박사는 당시 그 분야에서 많이 알려져 있는 유명한 학자였다. 그래서 나는 월 박사의 허락을 받고 그 대학원 강의를 빠짐없이 청강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에 부활절 휴가 때 누이가 공부하고 있었던 텍사스 여자대학교를 방문하여 누이의 지도교수와 만나서 그 분의 소개로 텍사스 A&M대학교를 견학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안내해주던 교수에게 고분자화학을 전공하는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더니 고분자를 연구하는 교수는 없고 유기합성을 전공하는 교수는 있다고 하기에 그 교수를 만나도록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런 연유로 만나게 된 분이 후에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되신 이스벨(Arther F. Isbell)교수였다. 면담 중에 그저 지나가는 말로 만약에 내가 당신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면 가능성이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적절하게 잘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하여 되물었더니 여전히 같은 대답이었다. 장학금도 워싱톤 디․씨 근처의 대학보다는 100불이나 많았다. 말하자면 공무원 출장이었기 때문에 수속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자급 AID 파견 연구원 자격으로 미국에 학위를 마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부연하고 싶은 점은 수속에 필요했던 추천서를 리오 박사에게 부탁했더니 서슴치 않고 추천서를 써주었다. 내용은 별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알게된 것은 두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나의 대학원 강의를 열심히 청강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겨도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추천서를 오기창님에게 보였더니 미국에서 이런 추천서 받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추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지금도 추천서를 써 줄 때는 매우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여하튼 함 선생님께서 나의 아파트에 머물고 계실 때는 나는 이미 여름에는 텍사스주로 내려가게끔 결정이 된 후였다.

하루는 선생님 식사가 너무나 부실한 감이 있어 한 30불 정도의 현금을 마련해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대접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미국의 실정을 모르기는 선생님이나 나나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그래서 아파트 근처에 있었던 ‘동경 스끼야끼’집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무슨 요리를 시켰는지는 지금 기억할 수 없지만 좀 짜게 먹는 나의 식성에서 일본 요리의 반찬으로 나오는 다꾸앙을 계속 가져오게 하여 식사를 마쳤는데 나중에 나온 계산서를 보니까 그저 거저 서비스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다꾸앙이 전부 계산되어 있는데 놀랬고 하마터면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랄뻔 했었다. 귀로에 선생님게서 무슨 말씀 끝에 ꡐ역시 소국은 소국이지 그런 점에서는 일본을 중국에 비할 수는 없지ꡑ라고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한 열흘 전에 출장대리로 있었던 포항공대의 박찬모 박사가 정식으로 총장으로 임명된 기쁜 소식에 접하면서 나는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있을 때 조석으로 선생님의 교통수단을 염려해주던 박 총장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이면 많은 시간을 함 선생님을 위해서 할애해 주던 당시의 박 총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 남아있는 몇 통 되지 않는 함 선생님의 편지(1962년 9월 14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저번은 와싱톤서 찬모군의 厚意로 잘 지내고 왔지요. 차차 만나보니 참 좋은 사람입니다. 맘씨 씀이 어쩌면 그럴가? 놀랬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극구 그 착한 맘씨를 칭찬하셨던 박찬모 군이 오늘 포항공과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였다는 것을 아시면 지하에서라도 매우 흡족해 하실 선생님의 표정을 그려본다.

어느덧 선생님께서 예정하셨던대로 플로리다로 떠나시게 되었다. 한국에 계실 때부터 자주 선생님을 찾아뵙던 미첼 씨(퀘이커의 한사람)가 플로리다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농장으로 선생님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퀘이커의 모임에 참석하시러 펜들힐로 가시기 전에 몇주일을 플로리다의 미 씨 농장을 방문하시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5월말인지 6월초인지 선생님이 플로리다로 떠나시는 것을 전송하기 위해서 선생님을 워싱턴 디․씨의 유니온 스테이션까지 모시고 나가서 파아러(parlor) 침대칸까지 선생님을 모시고 돌아섰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것이 미국에서 선생님을 뵙게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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