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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가벼움-12] 행복의 선택
[철학자의 가벼움-12] 행복의 선택
  • 교수신문
  • 승인 2019.05.2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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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행복은 '오는 것'이 아니더라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공부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런 것들은 책을 놓고 탐구한다기보다는 이리저리 현실 속에서 생각해보는 것인데, 책을 보고 씨름하는 것보다 더 진실 되고 솔직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정작 철학자의 의무가 여기에 있는데, 그저 텍스트 분석에 세월을 다 보낸 것 아닌가 후회되기도 한다.
공자님 말씀에, ‘책만 보면 뭐하나, 생각을 해야지. 생각만 하면 뭐하나, 책도 봐야지’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철학은 앞의 것(學而不思則罔)에 가까워진 것이 오래되었다. 동서 최초의 철학자인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쓰지 않은 철학자’인데, 그 이후 철학자들은 ‘쓴 것에만 매달리다’가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생각하는 것이 철학자의 의무인데, 생각보다는 읽는 데 바쁘다. 공자가 ‘책도 봐야지’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선현들의 생각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한 걸음 더 나아가 알아보라’는 권유일 텐데 우리 철학자들은 성현에 매달리고 자기는 아예 버린 것만 같다.
행복 이야기를 해보자. 행복은 누구에게도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것인데, 요즘 철학은 행복보다는 지식에 급급하다. 앎이 곧 지복에 이른다는 스피노자의 주장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의 궁극 목표는 앎을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한 앎이 곧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이지 행복을 뒷전으로 놓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윤리학이고 행복론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고민하는 행복론은 이렇다. 행복은 객관적일까, 주관적일까? 행복은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찾아가는 것일까? 행복은 하나의 물리적인 환경일까, 하나의 관점적인 의식일까? 행복은 혼자일 때 클까, 여럿이 함께할 때 클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두 뒤의 것에 손을 들게 된다. 행복은 아무리 따져 봐도 객관적인 표준을 잡을 수 없다. 물론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조차 문제가 된다면 생존의 문제이지 행복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행복을 떠드는 것조차 어불성설이 된다. 생존 앞에서 무슨 행복을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남들이 아무리 행복해 보인다고 해도 내가 그렇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점에서 행복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점은 행복은 상대적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와 상통한다. 누가 뭐래도 내가 행복해야 한다. 따라서 행복의 객관적인 표준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나도 행복이 나를 찾아오는 줄 알았다. 무슨 나비처럼 날라 오고, 바람처럼 불어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날라 오고 불어온 행복은 금세 떠나더라. 꿀만 따먹고 날라 가고, 그야말로 바람결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런 점에서 찾아온 행복은 바로 떠나갈 행복이기 때문에 쉽게 손을 잡았다가는 낭패를 본다. 결과적으로 행복은 내가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남’이 아닌 ‘나’의 행복이다.
행복이 환경이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환경은 우리의 어법처럼 ‘생존환경’이지 ‘행복환경’이 아니다. 행복과 생존을 구별하지 못하는 개념적 혼동이다. 행복한 환경이라는 말도 유복으로 표현되어서 그렇지, 결국은 경제적 환경에 불과하다. ‘행복추구권’은 ‘생존권’과 다르다.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행복할 때 그 행복이 아무리 주관적일지라도 행복의 총합에서는 늘어나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 같다. 스피노자도 그랬다. 내 생각으로는 행복1+불행1은 0일지라도, 행복1+행복1은 2는 안 되더라도 1.5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행복도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남이 부과 또는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그대는 행복한가? 아니, 오늘 그대는 선택했는가?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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