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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살리기, 그 뒤안길
인문학 살리기, 그 뒤안길
  • 교수신문
  • 승인 2019.05.0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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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교수신문 논설위원/서강대 화학
이덕환 교수
이덕환 교수

교육부가 ‘인문사회 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인문·사회 분야가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도 공감하고, 학술활동과 인재양성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학문적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문·사회에게 ‘관리’가 필수적으로 전제되는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황량한 ‘생태계’는 함부로 탐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관료들의 순한 양떼로 변해버린 과학자들의 경험을 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교육부가 인문학을 살려보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99년에는 이름부터 고약한 ‘브레인코리아(BK)21’ 사업이 있었다. 정부의 예산으로 연구기반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수의 깨어있던 인문학자들은 官制 ‘바보코리아’를 반대한다고 대학로에서 목청을 높였었다. 그러나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가뭄 끝의 단비와 같았던 예산 지원을 즐기기 시작했다. 학문 후속 세대의 수도 늘어났다.
  2007년에는 화려한 ‘인문학진흥기본계획’을 만들었다. 역시 어색한 이름의 ‘인문한국’(HK) 연구소들의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상위권 대학의 인문학자들은 모처럼 재정적 풍요를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다. 학술회의 참석을 위해 국내외를 여행하는 호사도 누렸다. BK의 지원으로 육성된 젊은 인문학자들도 ‘HK’의 직함을 달고 꿈에 그리던 연구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의 인문학 지원이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세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문학은 배고프고, 서러운 분야로 남아있다. 이제는 사회과학 분야도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애써 길러놓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사회에서 진로를 찾지 못하고, 정부의 지원은 여전히 쥐꼬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인문사회의 역할이나 중요성을 진정으로 인식해주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모든 이익집단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이번에 교육부가 내놓은 ‘생태계 활성화 방안’에 대한 관심은 다양하다. 교육부는 ‘학술연구교수’ 제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임시직·비정규직에 불과한 학술연구교수에게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하겠다는 발상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교육부가 마련해줄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역할이 어떤 것일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문사회학자들은 ‘학술전담기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과학기술 중심으로 운영되는 연구재단이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엄청난 규모의 연구개발 예산을 놓고 흥청거리는 이공계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독립된 학술전담기구가 자율과 풍요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망한 것이다. 이공계 정책연구기관의 현실도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육부가 강조하는 ‘사람 중심의 과학기술 혁신’은 경계해야 한다.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대등한 相生하자는 의도라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이 나서서 과학자들의 연구개발에서 파생되는 윤리적·법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자신들의 어설픈 철학이나 불합리한 정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정부 주도의 불합리한 연구개발에 시달리는 과학기술계의 현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교육부가 강조하는 ‘생태계’도 경계해야 한다. 본래 ‘생태계’는 정부 지원으로 개발된 기술과 양성된 인력을 활용하는 다운스트림의 ‘산업’과의 연계로 만들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뜻하는 정책학 분야의 개념이다. 주로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는 공학 분야의 연구개발 사업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생물학에서 생태계의 의미도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혹시라도 과학기술을 인문사회의 위기 극복을 위한 생태계 확장의 영역으로 여긴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교육부가 생색을 내면서 마련해준 어설픈 생태계에 안주하기보다 인문사회학자들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는 현실적인 방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학문적·이념적·종교적으로 독립된 인문·사회학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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