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0:05 (금)
미술비평: 황우철전을 보고
미술비평: 황우철전을 보고
  • 고충환 미술평론가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가의 꿈, 이상주의자의 꿈

황우철은 온몸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그림이 되고 싶어한다. "내 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땀과 습기와 온기들은 캔버스 위에서 색채가 되고 선이 되고 형상이 된다. 온몸이 그대로 그림이 되고 싶다"는 화가의 고백은 그대로 그림을 자신의 혼이나 분신에 비유하는 전형적인 화가의 신화를 닮아 있다. 그의 그림은 절제를 모른다. 내적 충동이거나 내적 필연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그림들은 그것이 그려지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계기나 매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지나치게 모자라는 결핍과 결여의 몫이며, 그리고 반대로 지나치게 차고 넘치는 과잉과 잉여의 산물이다. 예술의 모순과 창작의 아이러니는 그 無用한 행위가 삶의 의미에 접맥될 때 발생한다.

작가의 화면에는 이렇게 온몸으로 그려낸 화가의 개인사적인 내력(여러 형태의 자화상으로 나타난)이, 실천적 계기(화가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에다가 그림을 비유한다)가, 그리고 일말의 신비주의적 비전(화가는 자신을 숲의 춤을 주재하는 사제 혹은 무당에 비유한다)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흔적과 암시로 가득한 화면에서는 그 무엇 하나도 분명한 것이 없지만, 손에 잡힐 듯 생생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정형화된 형태의 안쪽으로는 결코 불러들일 수 없는 비정형의 자국과 흔적들에서 무의식의 충동과, 그리고 에너지와 욕망이 느껴진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선들과 비정형의 색 덩어리들이 어떠한 인과나 당위에도 구속받지 않고 모든 경계를 건너뛴다. 지나치리 만치 유기적이고 가변적이며 자유분방하지만 결코 혼란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일부로서의 질서의 몫만큼 혼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느껴진다.

삶의 일부로서의 혼돈이야말로 생명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질료이다. 그리고 뒤죽박죽인 꿈과도 같은 혼돈의 이면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돼 있다.

황우철은 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의 언어를 길잡이 삼아 그리지 않은 그림들을, 불면의 값을,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고 기억으로부터의 자화상을 그린다. 화가의 그림을 견인하는 중심적 개념들을 테마로 한 이 부제들 중에서 '그리지 않은 그림들'이란 미처 화면에 옮겨지기 이전의 화가의 무의식의 화판 위에 그려진 이미지를 뜻하며(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이란 말로써 이를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그려지지 않은 그림의 일부임을 뜻한다.

그리고 그려진 그림은 언제나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통로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암시와 흔적으로 가득한 화가의 그림은 이러한 결핍과 결여에 이어진 그림의 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불면의 값'은 철저하게 무용한 행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화가가 지불해야할 몫을 뜻하며, 허구와 허상 그리고 환영 속에서 실재를 찾는 화가의 운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화가는 실재하는 세계와 함께 그림으로만,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실재하지 않는 두 세계를 같이 사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세계는 언제나 결핍과 결여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그림은 그 실재하는 세계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보충하고 보완하는 형태로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그림은 언제나 실재하는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그린 것이며, 따라서 모든 화가는 혁명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이다. 황우철은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러한 이상주의자로서의 화가의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 '기억으로부터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머리에 뿔이 돋아나는, 머리에서 식물을 키워내는, 어깨 죽지에 날개가 돋아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뿔과 날개는 이상주의자를 뜻하여, 그리고 식물은 몽상가를 암시한다. 화가는 자신을 곧잘 숲 속을 배회하는 사슴에다가, 숲의 춤을 주재하는 사제에다가 비유하기도 한다.

이로써 황우철은 문명 이전의 자연이 내포한 원초적 생명력과, 논리적인 언어와는 비교되는 몽상적이고 시적인 언어, 그리고 모든 경계를 하나로 넘나드는 신화의 세계에서 그림의 당위성을 찾는다. 이 모든 전제 위에서 화가가 미처 그림으로 그려내지 못한 '아름다운 세상'은 마침내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