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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걷지 않는 부덕(不德)...걷는 행복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 걷지 않는 부덕(不德)...걷는 행복
  • 정세근 교수
  • 승인 2019.04.22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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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생각이 정리된다.
따라서 걷는 시간은 앆리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안배해놓아야
할 시간이다.

걷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냥 걸으면 됐지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왜 묻느냐는 분도 있겠지만, 쓸 데 없는 질문을 잘하는 사람들이 철학하는 사람들이니만큼 널리 양해 바란다. 쓸 데는 없지만 가장 요긴한 물음일지도 모른다.
이런 비유가 어떨까? 사실 서양전통에서 미학(aesthetics)은 감정(aesthesis)라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고 이성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따져보자는 것인데, 일반인은 그저 작품에 감동하면 되지만 철학자는 ‘우리는 왜 감동을 받는가’를 물어야 한다. 감동하는 자는 감상자이지만, 감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자는 미학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걷는 사람은 그냥 우리고 어디 가냐고 묻는 것은 의례적인 인사이자 실용적인 목적이지만, 걷는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자꾸 걷는지를 묻는 것은 철학의 일이다. 아이도 콧바람을 쐬고 싶어 하고, 어른도 산보를 하고 싶어 한다. 걷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왜 이토록 걷고자 하는가?
사람의 감정 상태와 연결시켜 말하면 훨씬 내 이야기에 공감을 할 것 같다. 대체로 우리는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걷는다. 요가를 가르치는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걷기만 해도 행복’이라는 것은 걷지 못하면 바로 깨닫는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권이자 나아가 행복권인 셈이다.
걸을 때 우리는 왜 기분이 좋아질까? 땀이 나서? 땀이 나면서 몸이 달아올라서? 답답하게 매어있던 몸이 풀어져서? 이건 몸의 순환으로 하는 설명이다.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 좋은 것과 같다. 운동이 아니고 사우나라도 땀을 빼면 기분 좋아지는 것처럼, 걸으면 몸속의 여러 수액이 요동치니 기분이 좋아진다.
걸을 때 우리는 왜 기분이 좋아질까? 주위의 사물과 교감할 수 있어서? 꽃도 볼 수 있고 풀도 볼 수 있어서? 이건 우리의 감각으로 하는 설명이다. 평소 자주 걷지 못했던 흙의 푹신함, 드넓게 퍼져있는 초원의 싱그러움, 다양한 꽃 색깔의 신비로움, 여러 새 소리의 어울림, 종잇장 같이 얇은 나비의 펄럭거림을 느끼면서, 잊고 있었던 우리의 감수성이 살아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이야기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온 몸이 제 짓을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신체에 주어진 형태가 제 기능을 하기 때문에 걸으면 즐겁다는 이야기다. 신체의 역할론이자, 그리스로마적인 탁월성(virtue) 이론이다. 발의 품덕은 걷는 것인데 그 덕이 실행되니 기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걸을 때 발만 움직이나? 팔은 흔들고 머리는 끄덕거리며 나머지 감관기관도 촉감을 곤두세울 터, 그것이 기쁨을 준다는 이야기다. 전통용어에 친숙한 나로서는 비르투의 전통적인 번역어인 ‘덕’(德)이 요즘 자주 쓰는 ‘탁월성’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발의 덕은 걷는 것이고, 조수미의 덕은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걷지 않을 때 부덕하며, 조수미가 노래 부르지 않을 때 그녀도 부덕하다.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덕인 것이다.
걸어 다니면 좋은 것은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걸으면 생각이 정리된다. 따라서 걷는 시간은 아낄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안배해놓아야 할 시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오늘은 정리는커녕 잡생각도 못했다. 왜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보느라, 새순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느라, 생각조차 못했다. 역시 생각이라는 인위는 자연 앞에서 꼼짝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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