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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아들, 제국을 멸(滅)하다
제국의 아들, 제국을 멸(滅)하다
  • 손영미 원광대 영문과
  • 승인 2019.04.0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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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경계 너머의 삶: 베네딕트 앤더슨 자서전』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손영미 옮김, 연암서가, 2019.02)

학창 시절 초현실주의 미술을 공부하다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깨끗한 흰 접시에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놓여 있고, 그 한가운데 박힌 누군가의 눈이 이쪽, 즉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상반신은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 물고기, 하반신은 젊고 관능적인 아가씨의 모습을 한 인어 그림도 있었다. 이런 병치(倂置)가 놀랍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모두가 극도로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가장 전통적인 기법을 동원해 전통 미술을 조용히 살해했다. 

명저 『상상의 공동체』(1983)에서 ‘민족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그 혁명적 잠재력을 논한 베네딕트 앤더슨이 일본 NTT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집필한 『경계 너머의 삶』(2016)은 마그리트의 작품이 보여주는 반전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이튼과 케임브리지에서 고전학을 공부한 구 대영제국의 엘리트이자, 전통적인 서구 문화의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보이는 저자가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는 물론, 인간을 억압해 온 수많은 기존 질서 및 기성 체제를 와해시키는 해방의 단초로서 ‘민족주의’ 개념을 제시했고, 백발의 가부장 같은 그 모습 뒤에 평생 젊은 혁명가와 투사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설파해 온 영원한 청년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럽 전통문화의 꽃이라 할 고전 교육의 산물인 앤더슨은 바로 그 교육을 통해 갈고 닦은 지성과 양심, 역사의식, 국제주의를 동원해 서구의 탐욕과 폭력이 짓밟은 아시아를 연구하고 그 정치·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경계 너머의 삶』은 이런 반전을 가능하게 한 앤더슨의 가계(家系)와 동학(同學), 개인적인 경험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잔혹한 식민 지배 및 가톨릭교 차별에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들을 다수 배출한 친가, 19세기에 이미 영국을 떠나 말레이시아 페낭에 근무하며 할머니를 위해 아일랜드식 가옥을 지은 할아버지, 케임브리지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가 해관(海關)에 근무하면서 동화 속 영웅처럼 쾌속정 선단을 이끌고 마약 밀수를 단속하고 군벌과 맞서 싸운 아버지, 영국 전역에서 딱 열세 명을 뽑는 이튼 장학생에 합격한 외할아버지-본인-동생 로리 등, 앤더슨의 집안에는 비상한 두뇌와 강한 정의감, 다른 지역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친밀감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이튼 및 케임브리지에서의 철저한 고전 교육, 조지 카힌 등 코넬대에서 만난 탁월한 스승 및 선후배, 평생 이어진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과의 우정, 특유의 친화력과 언어 능력,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여러 장르의 예술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이라는 특별한 학자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 이런 경험과 배경에서 비롯된 독특한 시각과 분석 방식으로 그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버마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다.

▲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08.26 ~ 2015.12.12)
▲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08.26 ~ 2015.12.12)

그런데 진정 흥미로운 것은, 유튜브에 올라온 수많은 앤더슨 관련 영상들을 보면 그는 정의감에 불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카페든 사원이든 방송국이든 어디서나 끊임없이 배우고 대화하며, 동티모르든 인도네시아든 버마든 정치적으로 억압받거나 희생되는 사람들을 보면 분연히 그들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보통 사람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올라오고 있는 영상들을 보면 동남아시아의 대중가요나 전통 음악, 존 레논의 「이매진」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배경으로, 그와 어울리며 소중한 추억을 쌓았던 이들의 슬픔과 그리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정치 활동에 대한 존경의 표현들이 마치 일련의 성인전(聖人傳)처럼 쌓여 가고 있다. 종교인도 연예인도 아닌 학자, 그것도 정치학자의 죽음이 이처럼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사람들로부터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찬미되는 예는 극히 드물 것이다. 이는 물론 앤더슨이 평생 가장 중시했고 실천했던 두 가지 가치, 즉 ‘억압 받는 이들의 해방’과 ‘만국 청년들의 연대’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리라. 신자유주의, 기후 변화, 핵무기 경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고용 불안 등, 세상은 앤더슨의 시대 못지않게 어둡고 잔인하고 암울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기쁨과 사랑을 잃지 않았던 그의 행적이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경계 너머의 삶』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도 가장 폭력적이었던 20세기에 바로 그렇게 열린 마음과 뜨거운 열정으로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삶과 학문을 더 큰 역사·문화적 맥락을 배경으로 차분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서전이다.
 

손영미·원광대 영문과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 영문과에서 석사학위를, 켄트 주립대에서 에밀리 디킨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문학 연구에 더해 번역에 관심을 갖고 있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권의 옹호』, 포드 매덕스 포드의 『훌륭한 군인』,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등 충실한 번역으로 소개되어야 할 고전들을 우리말로 옮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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