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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소방훈련
나의 강의시간: 소방훈련
  • 이영희 한양대
  • 승인 2003.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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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담당하는 과목은 교양과목이다. 교양과목은 언제나 그렇듯이 학생수가 100명이 넘어가는 일이 예사다. 특히 지난 학기 한양대에서 맡은 '관광과 지리'라는 과목은 무려 수강생 숫자가 400명에 달했다. 이렇게 대형강좌만을 맡다 보니 으레 걱정이 되는 것이 비상시 학생들의 안전문제이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소방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비상시 대피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소방훈련을 실시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웃집의 화재를 소화기로 진압해서 소방서로부터 표창장을 두 차례나 받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소화기 사용 방법 및 그 중요성에 대해 가족들에게 자주 말씀을 해오셨다. 이런 아버지 덕택에 나는 비교적 소방훈련이 생활화되어 있는 편이다. 이 밖에 또 다른 계기는 영국서 포스트닥 과정을 밟을 때 연구실이 속해 있던 건물의 총책임자인 수학과 교수로부터 철저한 소방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 교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동안 나를 데리고 다니며 건물구조 및 비상벨 누르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했고, 또 화재가 났을 때 대피할 수 있는 최단 거리 동선을 잰걸음으로 확인시켜 주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5월 한양대에서 소화기 사용법 소개 및 비상시 대피훈련을 실시하였다. 

우선 소화기 사용법 소개는 3단계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제 1단계에서는 학생들에게 학교 건물에 설치된 소화기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제 2단계에는 百聞이 不如一見이란 말처럼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고 노즐을 임의로 정한 화원을 향하게 한 후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는 등의 직접적인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소화기 관리에 관한 것으로서 소화기 계량기의 눈금이 정상이거나 과충전 표시를 가리킬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눈금이 재충전 표시를 향할 때는 반드시 질소 충전을 해주어야 사용이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이어 비상시 대피훈련은 두 차례 실시하였다. 우선 처음엔 실제상황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서 암막을 친 상태에서 예고 없이 갑자기 전등을 끄고 학생들에게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소지품을 챙기느라 우왕좌왕하고 일부 학생들은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는 강의실을 내려오다가 뒤따라오던 학생들에게 밀려 넘어지기도 하였다. 또 어떤 학생들은 책상으로 문을 막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비상시 대피훈련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 같다. 다음 두 번째 대피훈련 때에는 처음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솔자를 뽑고 또 학생들에게는 모든 소지품을 그대로 둔 채 몸만 빠르게 대피하도록 하였다. 특히 인솔자에게는 강의실에서 건물 밖까지의 가장 짧은 동선을 미리 파악하도록 하고 훈련할 때 출입문을 열어서 학생들을 빠르고 질서 있게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나의 소방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처음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할 일이 없으면 공부나 계속 하자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첫 번째 대피훈련시 보여진 학생들 자신의 우왕좌왕하는 모습 속에서 학생들 스스로 재난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면서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지금도 일부 학생들은 나에게 "자신도 이 다음에 교사가 되어서 소방훈련을 꼭 실시하겠다"거나 또 "어디에 있든지 비상구와 소화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종종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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