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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와 바오 닌 사이에서
뒤라스와 바오 닌 사이에서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 · 불문학
  • 승인 2019.02.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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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 도시에 대한 기억과 기대는 저마다의 삶의 배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특히 사이공 혹은 호찌민은 사람들의 욕망 속에서 서로 다른 색채로 덧칠해지고 이미지화되는 도시이다. 프랑스인들은 식민지 시절의 베트남을 추억하는 영화 「인도차이나」의 카트린 드뇌브의 시선으로 아직도 이 도시를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안남의 황녀와 프랑스 해군 장교의 사랑이라는 모티브는 그들이 문학을 통해 다루어온 이국정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미군 크리스와 베트남 전쟁 고아 킴의 사랑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사연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방학을 이용해 호찌민에 다녀왔다. 호찌민에 머문 사흘 동안 아침은 바게트와 커피로 저녁은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셨다. 노트르담 성당과 오페라 극장을 보며 파리를 기억하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박물관 회랑을 걸으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아무리 불문학도였다고 하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식민지 시절의 사이공을 그리워하는 듯한 태도는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었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사이공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기보다는 1930년대 프랑스령 베트남에서 태어난 프랑스 국적 소녀의 의식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만, 식민지 지배자의 우월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가난한 백인 소녀라는 모순된 상황과 사춘기의 불안, 성에 대한 자각이 뒤얽혀 있는 ‘나의 어린 시절’이 소설의 근간이다. 호찌민의 차이나타운인 쩌런은 ‘어린 백인 창녀’인 소녀가 부유한 중국인과 밀회를 나눈 곳이다. 그들이 만나는 쩌런의 집은 대낮에도 어둡고 블라인드 사이로는 거리의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는 노란색의 짜땀 성당이 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구데타 세력을 피해 은신한 곳이 쩌런의 성당이었다. 사이공의 역사 자체가 이방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인지도 모르겠다. 뒤라스의 『연인』은 1930년대 사이공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코친차이나’ 시대의 역사와 베트남 사람들의 삶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소녀가 어머니의 학교가 있는 사덱에서 메콩강을 건너 기숙사가 있는 사이공으로 돌아가는 여정 말고 독자들이 이 나라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다. 소녀가 중국인과 밀회를 나누는 차이나타운이 베트남과 중국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제3의 공간이듯이 사이공 역시 그녀에게는 파리의 이미지로 채색된 가상의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다.

베트남과 사이공, 더 나아가 그곳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온전한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 소설이 있다면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이다. 바오 닌은 하노이에서 태어나 소설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베트남 인민군에 입대해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될 때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살아남은 작가이다. 주인공 끼엔은 사이공의 떤선녓 공항까지 진격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만 소설 어디에도 해방과 승리의 기쁨은 나타나 있지 않다. 죽음과 살육, 고통, 이별, 그야말로 전쟁의 슬픔으로 점철된 소설은 해방군이 아닌 패자의 기록에 더 가깝다. 교정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끼엔과 푸엉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은 『연인』의 슬픔과는 그 차원과 깊이를 달리한다. 끼엔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많은 것을 잃었다. 그는 “과거에 묶여버렸고 슬프고 괴로운 기억을 지우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더 쉽게 되살아났다.” 여행자의 피상적인 관찰만으로는 오늘날 호찌민 시민들의 눈에서 ‘전쟁의 슬픔’도 식민지 시절의 기억도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물인 인민위원회 청사에 금성홍기가 나부끼고 아침마다 노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다시 세운 호찌민을 본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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