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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주목한다]『윤치호 일기』(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刊)
[이책을주목한다]『윤치호 일기』(김상태 편역, 역사비평사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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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7 16:24:53
“그동안 내가 관계했던 모든 공공운동이 실패로 끝났다. 아니 단순히 실패로 끝난 정도가 아니라, 내게서 또다시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앗아가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내겐 연로하신 어머니와 어린아이들이 있으며, 그들의 건강과 행복이 무척 중요하다. 내겐 가망이 없는 사업에 모든 걸 내걸만한 용기가 없다.”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는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는 일제 시대의 조선인 세력가이자,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무수한 유력인사를 배출하고 화려한 혼맥의 중심에 있었던 해평 윤씨 집안 사람이다. 구한말에 개혁운동에 투신,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는 “실패”를 맛본 후, 윤치호는 이상과 명분을 접고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듯하다. 세 번의 결혼으로 5남7녀를 두었고, 지식인 재력가로서 조선인 최고의 특권을 누렸던 그가 현실의 근본적 변혁을 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일기 곳곳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묻어난다.

그러나 윤치호가 해방 직전까지 60년에 걸쳐 기록한 일기는, 그가 정치 들러리 자격으로 관찰하고 참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료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소시민적 자기반성과 무력감 및 자기합리화 기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적 전형성’을 획득한다. 실제로 그는 삼일운동 무용론을 주장하며 ‘선동가를 비난하고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소년 소녀들을 끌고 가느라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난 이 광경을 보면서 흐느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힘이 없는 내가 뭘 어쩌겠는가?... 그저 이 용감한 남녀들 중 단 한 명도 나의 그릇된 약속이나 조언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임시정부를 불신하며 자금지원 요청을 거부하는 등 (“임시정부 인사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하이 조계에 본부를 차리고 해외에 체류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잘 알면서, 왜 내가 나 자신과 가족을 무자비한 일본 법령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 잘 모르겠다.”) ‘친일파’로 분류되기에 충분한 언행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나름대로 객관적인 인식이 수반된 ‘합리적’ 결정이었다.

윤치호의 일기는 당대 유학파 지식인의 전형적 정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자국민에 대한 ‘제3자적’ 비판은 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조 중 하나다 (“버젓한 음식점 하나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하길 원하니,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이런 양비론의 정조가 힘의 논리를 수긍하는 패배감을 지지한다 (“영국이 인도를 병합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한 것처럼, 일본도 만주를 점령하거나 병합할 권리가 있다”). 한편, 그의 일기엔 서양에 대한 동경과 비난이 공존하는데(“앵글로색슨족…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리분별력이 높은 민족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인은 유색인종의 땅에 들어가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만끽하며 자유롭게 나돌아다니면서, 정작 유색인종에게는 자기네 땅에 범접하지 말라고 목청을 높인다.”),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의 구실이 된 것도 동포에 대한 불신과 함께 백인에 대한 분노인 듯하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는 ‘친일행각/독립운동’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되기 어려운 무수한 생활인의 대소사가 들어있다. 국채보상운동 자금유용사건과 허술한 뒷마무리, 현제명이 흥사단 회원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복직을 위해 뇌물을 증여한 사건 등 공공연한 뇌물 수수 관행, 기호파와 서북파 사이에 있었던 ‘지역감정’ (안창호가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윤치호가 세 번째 아내에게 품고 있던 경멸과 미움, 그리고 일제의 묵인 내지 비호 하에 대중운동을 지휘했던 지식인들 사이의 각종 염문과 음모 등은 흥미감 만큼이나 서글픔을 자아내는 일화들이다.

윤치호가 ‘처세술 이상의 역사적 비전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다. 윤치호의 일기를 발췌·번역(일기의 원문은 영어다)한 편역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분명히 ‘주관적’으로는 애국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객관적’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저버린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윤리적 판단이라는 근대사의 과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물론 실제 역사가 시비를 가리지 못할 때, 역사학이 판관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일파’가 60년 동안 꾸준히 기록한 방대한 일기가 미시사의 보고로 활용될 만큼 여유가 생길 때는 언제일까.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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