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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과 대학의 책임
학벌과 대학의 책임
  • 정세근 충북대
  • 승인 2003.07.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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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정 세 근 (충북대, 철학)

교수는 한마디로 학벌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이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대로 학벌이 있으니 교수가 된 것이지만, 학벌문제 때문에 교수의 의욕이나 희망을 잃기 때문이다. 왜 교수가 학벌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1등부터 꼴찌까지 정확한 점수로 줄서는 대학환경에서 1등은 영원한 일등이고 2등은 영원한 이등이다. 따라서 1등도 공부하지 않고, 2등도 공부하지 않는다. 교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학생이 1등이면 1등 교수고, 학생이 10등이면 10등 교수다. 아무리 신설학과라도 1등 대학에 세우면, 후발주자라는 약세를 무릅쓰고 금새 1등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니 선발이든, 후발이든 공부하지 않는다.

교수들이 한탄해마지 않는 학생들의 실력저하, 그러나 재밌게도, 그 책임은 대학제도에 있다. 정확히는 대학서열화이다. 일류는 영원한 일류, 삼류는 영원한 삼류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대학은 이류를 받아 일류로 만들어내는 곳이라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오히려 천재가 날개를 펼 의미를 찾지 못할 뿐이다.

이런 대학서열화는 곧 공교육의 붕괴와도 맥을 같이 한다. 모두 1등만 하려 한다. 도덕성이나 지도력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한 점수의 체계 내에서 소수점까지 매겨진 1등이 되려고 한다. 그러니 국어시간에 소설을 읽거나 과학시간에 실험을 하는 경우는 없고, 오직 성적을 위한 다이제스트만 난무한다. 밑줄 쫙 그라면 그뿐, 토론도 의심도 없다. 그러니 다들 학원으로 몰리고 학교는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대학이 나서서 사람을 뽑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능점수라는 기막힌 잣대가 있어 그것만 엿보고 사람을 뽑는다. 그 이상은 귀찮을 뿐이다. 아니, 대학이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입시전문학원이 대학을 평가한다. 중등교육이 대학에 종속적이듯, 대학도 자족적이지 않고 학원에 종속적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성적 때문에 자살을 한다. 고3학생이 작년에 8백명이 자살했다는 비공식보고도 있지만, 대학에서 연구가 힘들어 8명이라도 자살했다는 보고는 듣지 못한다. 게다가 대학은 외국의 어떤 대학보다 훌륭한 학위를 내지 못하고, 오로지 수입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학문의 자생성은 확보되지 못하고, 대학조차 정리와 암기의 수준에서 그친다. 수입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학문을 ‘외우기’로 정의하고, 중등교육에 똑같이 외우기를 강요한다.

의대나 법대의 수재들이 대한민국의 철학과 문학 그리고 역사를 책임지지 않아 인문학이 고생한다. 혹 하나가 잘 해도 더불어 함께 할 수 없어, 끌어내리기에 바쁘다. 여기에 창의성이나 공동의 선이라는 것은 자리조차 잡기 힘들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6.18)나 학벌주의 극복방안 수립을 위한 합동 기획단(6.25)조차 동창회 수준이 되기 십상이다. 이 사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임에도 특정 집단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주류에서 탈락된다. 청소년기의 오직 한 번의 평가가 평생 족쇄가 된다. 한 번만의 경쟁을 강조하는 이상한 나라다.

한 대입학원은 1년에 3백억 원(단일학년)의 수입으로 서울의 큰 사립대학들의 재정운영 규모 3천억의 절반과 맞먹는다. 사교육비는 연간 7조원이며, 대학생 자녀 1인의 교육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돈도 6조원에 이른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2년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제 직무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견이 16.7%에 불과했음에도, 몇몇 기업은 여전히 인권위원회의 학력란 폐지 권고를 무시하려고 한다.

내 주위에는 이른바 기러기 교수도 많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의 아빠가 된 교수도 많다. 그들은 ‘따뜻한 아침국’과 ‘학부형’이라는 자연인으로서의 권리와 이름을 포기했다. 왜 그런가? 다 학벌과 관련된 교육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그 먹이사슬의 정점에 대학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교수는 공교육 붕괴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가 나서지 않는 한, 근원적인 치유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해방 이후 우리 교육을 책임져온 교육학자만이 아닌, 현장의 일반 교수가 나서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사교육의 천국이자 공교육의 지옥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점차 대학도 붕괴되고 있다. 개나리 펴오는 순서에 따라 대학이 망해가고 있다. 지방대 학생은 면접조차보지 못하는 신세다. 행여 지방이 망하고 서울만 남아도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주장을 접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학벌문제를 생각할 때다.(www.antihakbu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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