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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泉을 맴도는 넋이 一萬이라 . . . 이곳에 설잠드시니, 이름하여 萬靈堂이라”
“九泉을 맴도는 넋이 一萬이라 . . . 이곳에 설잠드시니, 이름하여 萬靈堂이라”
  •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 승인 2019.01.0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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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_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2-⑥ 소록도 만령당(萬靈堂)을 찾다

한센병 환자 색출, 강제수용의 흑막

지금은 문둥병, 나병이라 하지 않고 한센병이라 하는데, 우리나라 전통시대에 이 질병은 역병(疫病) 즉 집단적으로 생기는 전염병이었다.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에는 이 질병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질병 관련 사례와 사회적 문제가 기록되어 있다. 이 병은 의료선교사나 조선총독부가 근대적인 세균학적 지식을 보급하고 난 다음 비로소 전염병으로 확정되었다. 20세기 내내 ‘나병’이라는 용어로 통용되었지만, 이 환자들을 격리-차별했다는 이유로 현대에는 인권존중 차원에서 나병 대신에 ‘한센병’이라는 용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정근식 2017a, 19-24 참조).
서기재 박사가 정리한, 1929년 간행된 잡지 『조선(朝鮮)』의 7, 8, 9월호에 수록된 각도 경찰부 위생과의 ‘한센인의 풍습과 미신요법’ 관련 조사에 따르면, 전라남도·경상남도·강원도에서 “‘아이의 간’ 혹은 ‘인육’을 먹으면 완치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것은 한센인을 혐오=위험시하는 담론을 형성하여, 먼저 비환자=대중들 스스로가, 다음으로 총독부가 한센인들을 적극 추방, 격리수용을 하도록 요청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전략이었던 것이다(서기재 2017, 428-9 참조).     
잠시 유준(柳駿) 박사(영남대 총장·재단이사장 등 역임)가 구술한 「주방(周防) 원장 이야기-3」에도 잘 드러나 있다. 주방(周防)은 ‘주방정계(周防正季)’ 즉 ‘스오 마사스에’를 말한다. 말이 나온 김에 그에 대해 약간 언급해두기로 한다. 여러 기록에는 주방(周防)을 ‘수호’ ‘슈호’, ‘정계(正季)’를 ‘마사히데’, ‘마사키’ 등으로 읽기도 하나, 모두 잘못이다. 1933년 제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1933-1942)는 부임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용인하지 않고 교회를 탄압하는 대신,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일본의 황실과 일제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였다. 한센인들의 소록도 생활은 차츰 강제노역과 굶주림, 학대 등으로 절망상태에 도달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환자들은 전쟁물자 공출에 동원되어 고통은 극에 이른다. 심지어 스오는 현재의 중앙공원에 환자들의 돈으로 자신을 위한 동상마저 세우고(1940년 8월 20일 제막) 매월 20일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6월 20일 오전 8시, 스오 동상 참배와 그의 훈시를 듣기 위해 환자들이 집합한 자리였다. 청년환자 이춘상이 갑자기 뛰어나와 스오의 흉부를 칼로 찌른다. 스오는 곧 숨졌다. 이춘상은 당시 소록도갱생원의 인권탄압과 그 부당성을 폭로하고자 하였다(정근식 2017a, 143 참조). 이후 중앙공원의 스오 동상은 철거되고 흔적만 남아있다. 1972년 5월 17일, 개원 56주년을 기념하여, 큰 바윗돌에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새겨 ‘한하운 시비’라 이름 붙였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유준 박사의 주방(周防)과 일제강점기 나환자 관련 구술증언을 들어본다.

▲ 만령당 1.
▲ 만령당 1.

주방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한다면 난 이러고 싶어요. 한국의 문둥병을, 그 당시에 주방이 전에는, 문둥병이라는 것은 공포의 비극의 상징 밖에 안 됐어요. 1927년, 그 때 기록을 보면, 나환자들 떼를 지어가지고 댕기면서 행패를 부리고, 잔치집을 습격을 하고, 뭐 그런 기록이 허다해요. ‘어린애들 잡아먹었다, 쪄먹었다’ 그런 기사가 연간 한 5, 6건씩 있었다구. 내가 어렸을 적에도, 우리 충청도, 내가 천안 사람인데, 문둥이 나온다고 말이야, 나가 놀지 말라고, 보리밭에 나가지 말라고, 그런 기억이 있거든요. 그 때 나환자들도 그러니까 자기들 혼자 살기가 힘들 거 아니에요? 어디 가서 혼자 다니다가는 잘못하면 동네 사람들한테 맞아죽을 염려도 있고 그러니까, 떼를 지어가지고 저들끼리 있어 가지고, 어떤 잔치집이 하나 있으면, 혼인집 같은 데서는, 어떤 사람이 환갑잔치를 하는데, 나환자 떼가 와가지고, 그냥 막 해서, 환갑잔치가 그냥 엉망이 되고, 막 소동이 벌어지고 그런 기사도 있더라구요.
그랬는데, 그때 어떤, 그 사람 이름을 기억을 못하겠어요. 신문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사회에서 나환자 옆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막, 저항하고 그랬을 거 아니예요? 그때 어떤 그 사람 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주 스마트한 사람이야. 나환자가 자기들끼리 회를 만들어 가지고, 상조회를 만들었어요. 상조회라는 게 거기서부터 나왔더라구요. 그래가지구 저희들끼리 인제, 해가지구, 그담부터는, 어디서 초상집이 생겼다, 무슨 환갑잔치를 한다 그러면 떼를 가서 방해를 하고 협박을 해가지고 밥을 얻어먹고 지불받는 게 아니라, 아주 정식으로 대표를 보내가지고 교섭을 해서, “아, 댁에 환갑잔치를 하니까 우리 몫으로…”, 모르지 난 상상컨대, “돼지 반 마리만 달라" 그랬든지 원, 갈비 반짝만 달랬든지, 협상을 하고, 그렇게 해서 일반 주민하고, 나환자간에, 그런 거를 했더라구요. 그런데 그거를 그 당시 총독부에서 보호를 했더라구요. 승인을 하고, 상조회라는 걸. 그것이 한 군데에서 그렇게 성공을 하니까, 그 지부가 생겼더라구. 여하튼 소록도로 나환자를 붇들어 가니까 상조회 있으면 안 될 거 아뇨. 상조회 인제 못하게 했다구요. 박순주인가 하는 맞아 죽은 사람 있잖아요. 환자대표. 그 사람이 왕초 대장이었다구요. 경상도에서 환자들 모집 데려올 때 그게 왕초니까(국사편찬위원회 2005, 258-9).

▲ 만령당 2.
▲ 만령당 2.

유준 박사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①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행동과 관련 기사 건, 그리고 ② 그들의 단체행동과 조합설립 및 금지된 이유의 건이다. 특히 한센병 환자 관련 혐오사건 기사가 ‘연간 한 5, 6건씩’ 있었고, 그 반면에 환자들은 ‘떼’를 지었다가 드디어 ‘단체행동’→‘조합’으로 이어졌다가 소록도로 격리수용하게 된 다음 상조회 활동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는 당시 대중들에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단체활동=상조회 허용으로 양성화=현황파악을 하고 있다가 결국 소록도로 격리수용 되어가는 레퍼토리로 요약할 수 있다. 그 배후에 ‘총독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한센병 환자들을 추방, 격리하도록 대중들과 총독부에 요청하기 위한 당시 언론의 보도는 일본어 신문이든 한국어 신문이든 섬뜩할 정도였다. 당시 한센인 관련 주요 기사 제목 몇 건을 소개해보면 이렇다(서기재 2017, 427 참조): 「나병에 걸린 자기 아이에게 인육이 약이라고 듣고 - 거지 소년을 죽인 엄마 마침내 사형」(『朝鮮朝日』1925.10.22)/「어린 아이를 죽여 생간을 꺼낸 한센병 환자」(『朝鮮通信』1927.3.18.)/「살아있는 사람에게 떨어지는 피를 빨아먹는 흉폭무자비한 살인귀」(『朝鮮朝日』1928.3.30.)/「생간을 빼내는 나환자 일당」(『京城日報』1928.6.10.)[이상 일본어 신문]. 「미신은 망국의 화원(禍源): 문둥이는 음경을 먹어도 결단코 병은 낫지 안는다 - 타파하라 속히 미신을!」(『東亞日報』1920.8.13.)/「십이세소아(十二世小兒)를 할복후적간(割腹後摘奸)」(『東亞日報』1927.3.15.)/「청춘소부식인귀(靑春少婦食人鬼) 칠세여아(七世女兒)를 압살팽식(壓殺烹食) 악귀(惡鬼)도 전율(戰慄)할 미신참극(迷信慘劇)」(『東亞日報』1928.5.15.)/「무덤을 파헷치고 어린애 송장을 먹어」(『朝鮮日報』1930.9.7.)/「문둥병자가 오세아(五世兒)를 죽여 경주에서 일어난 대소동 - 가경(可驚)할 미신(迷信)의 폐해(弊害)」 (『朝鮮日報』1931.9.1.)[이상 한국어 신문]. 이런 끔찍한 기사를 읽는 대중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보다도 흡혈귀나 식인종, 살인마 취급을 당하던 환자들은 어떠했을까.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미당 서정주의 초기 시 ‘문둥이’를,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쓴 시이다. 

해와 하늘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문둥이」 전문)

어릴 적, 그러니까 60년대쯤 보리가 푸르게 자라나 누렇게 익을 무렵이면, 어른들로부터 ‘보리밭에 가면 문둥이가 간 빼 먹으니, 가지 말거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래서 혼자 보리밭에 가는 것을 꺼렸다. 문둥이가 ‘낮’(=해와 하늘빛)을 두려워하고, ‘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 없는 애기를 죽인 데 대한 죄책감,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한(恨)스러움과 고통, 세상의 질시와 박해를 피해 밤에만 유랑하는 서러움 때문이리라.

▲ 만령당에서 내려다 본 마을과 바다.
▲ 만령당에서 내려다 본 마을과 바다.

만령당 앞에서

만령당 뒤편의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게 되었다. 앞으로 돌아와 보니, 2017년 10월 1일 ‘11,009위 합동추도식’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 오른편에는 ‘한록비(恨鹿碑)’(한 많은 소록도의 넋을 위한 비석)가 있어 읽어본다.

아, 아! 八旬前 이곳.
작은 사슴섬에 慈惠의 나래가 내려 오늘에 이르며,
무릇 幾何의 恨魂을 달랬음이랴.
해지면 날새도 둥지찾아 든다는데,
사람되어 한세상 살고도 고향산천자락, 부모형제 품안에
눕질 못하고 九泉을 맴도는 넋이 一萬이라. 恨의 눈물을
뿌리며 몸을 병마와 싸우다 찢기고 지친 肉身,
머리만 고향 쪽에 하고 이곳에 설잠드시니, 이름하여 萬靈堂이라.
그 넋인들 어이 편히 잠 드실까!
하여 이곳, 사슴의 가슴패기에 恨서린 돌비하나 세우노니.
오가는 사람들아!
오늘도 눈비 맞으며 흐느끼는 一萬 넋의,
冥福을 함께 合掌코자 함이 어이다.

1991년(慈惠 75주년) 5월 17일에
金長龍의 뜻과 積善으로,
李松炯의 글을 받아,
金容珍 쓰고,
李漢雨 새겨,
第23代 원장 孫泰休가 세우도다.

사망한 환자들의 시체는 검시실에서 해부된 다음, 장례식에 이어 화장을 거친 뒤, 나무상자에 넣어 유족에게 인도된다. 그러나 대부분 인수되지 않아 이를 안치할 납골당을 1937년 신생리 산 중턱에 세운다. 납골당 설치에 드는 경비는 모두 환자들로부터 강제헌납 받았다(정근식 2017b, 102 참조).
일만의 넋. 일만의 한. 일만의 역사. 어쩌면 이렇게 초라할까. 적힌 내용 이외에 내가 덧보탤 말은 없다. “九泉을 맴도는 넋이 一萬이라. 恨의 눈물을/뿌리며 몸을 병마와 싸우다 찢기고 지친 肉身,/머리만 고향 쪽에 하고 이곳에 설잠드시니…” 이것을 ‘만령당(萬靈堂)이라 했다. 한하운은 친필유고에서 이렇게 읊었다. “천형 섬에는/납골탑이 확답.//끝내 ‘나병이 낫는다’는 신화가/우악한 산하에도 불어오는가./…/찬란한 슬픔의 소록도./아으 50년.”( 「희(噫) 50년 -소록도 병원 50주년 기념에」 일부: 한하운 2010, 205)
이곳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아늑하다. 그래도 마을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그 건너의 산도 보인다. 만령에게 바치는 선물이 지금 이 고요한 풍광밖에는 없다. 들판에 핀 이름 없는 꽃들은 그냥 대지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고요히 흔들릴 뿐이다.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저 ‘한 서린 돌비’를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일이다. 이렇게라도 찾아와서, 누군가 이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돌비’(=돌)를 읽고서, 기려주고 기억해주는 일이리라. 그래서 ‘만령’이 무언, 침묵으로 말하는 메시지를,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로 바꿔서 듣고, 산 자들은 이 땅 위에 다시 건강하게 살아가야 한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불러 모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침묵과 무언에서 나오는, 저 무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이고 흔적들이다. 귀 있는 자 듣고, 눈 있는 자 보리니….

▲ 자혜의원, 지금은 폐쇄돼 있다.
▲ 자혜의원, 지금은 폐쇄돼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윤리

나가는 길에 감금실과 검시실을 살펴본다. 머리에 떠오르는 어휘. ‘생체실험, 한센인 마루타, 한국판 아우슈비츠…. 언젠가 이 섬도 고령화 때문에 예전 환자들의 수가 차츰 줄어들고, 수많은 아픈 기억마저 망각의 바다로 밀려갈 것인가. 그래서 불안하다. 어쨌든 살아있는 자들의 윤리는 과거의 이곳을 제대로 기억하는 일에서 시작될 듯하다. 과거의 아픈 역사는, 미래를 향해 의미 있도록 앞서가면서 다시 상상해볼 일이다.     
언젠가, 추억같이 눈이 내리면, 나는 한하운의 다음 시를 읽으며, 다시 생각에 잠길지도 모른다. “눈이 오는가./나요양소(癩療養所)/인간 공동묘지에/함박눈이 푹 푹 나린다.//추억같이…/추억같이…//이렇게 머뭇거리며/눈을 맞고만 싶은 밤이다.//눈이 오는가./유형지(流刑地)/나요양소/인생공동묘지에.//흰 편지 따라 소식 따라/길 떠나고픈 눈 오는 밤이다”(「신설(新雪)」일부: 한하운 2010, 163-4). 중앙공원 쪽을 다시 둘러보고, 이제 소록도를 떠난다.

▲ 한록비(恨鹿碑)
▲ 한록비(恨鹿碑)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구술사료선집 1: 한센병, 고통의 기억과 질병정책』,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5)
* 서기재,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근대사: 일본어 미디어를 통해 본 대중관리의 전략」,
  『의사학』 제26권 제3호 (대한의사학회, 2017.12)
* 정근식 책임편집,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역사편)』 (고흥: 국립소록도병원,
  2017a)
* 정근식 책임편집,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100년: 1916-2016』
  (고흥: 국립소록도병원, 2017b)
* 한하운, 『한하운 전집』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0)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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