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7:35 (금)
'한국의 누드미학 2003'展, 몸에 대한 반성과 전망의 부재
'한국의 누드미학 2003'展, 몸에 대한 반성과 전망의 부재
  • 이선영 미술평론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여주기에 그친 누드...엄밀한 큐레이팅 아쉬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이 1999년 재단법인으로 출발한 이래, 대형 기획을 통해서 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번에 열린 '한국의 누드미학 2003년'전은 가장 대중적인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누드'를 선택했다.

누드는 조형미술의 근본으로, 자고로 미술가란 누드로부터 습작을 시작하고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실험적 시도를 감행할 때도 누드를 통해 미학적 선언을 하곤 했다. 개막일 날 누드 크로키를 공개적으로 벌이며, 미술관 로비에 영상물들을 설치하고 근대미술사의 자료를 소개한 것은 누드에 다소 낯선 대중들을 배려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동원한 이 대형전시는 우선 분류상의 난맥으로 혼돈을 야기한다.

기획측은 특별 초대작가인 김흥수와 김호걸을 필두로 총 66명의 작가들의 작품이 6개 부문-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에로티시즘-1(평면)', '에로티시즘-2(입체)', '영상매체와 이미지'-으로 나뉘어 전시됐다. 우선 서구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한 구체적 미술사조를 전면에 내건 것에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의 맥락에서 쓰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주의적', '표현주의적'이란 말은 흔히 쓰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에로티시즘은 무엇인가. 사과, 배, 딸기…하다가, '다리 두 개인 것'이란 카테고리가 불쑥 나오는 격이다. 이러한 혼돈이 엄격한 동일성의 원리에 따른 분류와 명명의 관습을 문제삼자는 의도를 가지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이 전시의 무의식 속에는 '에로티시즘'이란 항목이 어떤 사조와도 맞먹을 만큼 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전시의 '리얼리즘'이나 '표현주의'에서도 에로틱한 작품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초현실주의'야말로 억압된 욕망의 해방을 외치던 사조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런 분류의 난맥보다 더 심각한 것은 누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반성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어쩌면 그것은 출품된 그림 자체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일 테지만, 엄밀한 큐레이팅을 통해 미술사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을 만큼 전시기획의 위상이 높아진 현대에, 누드라는 새삼스런 주제를 내걸었다면, 기존의 미술을 다시 읽을 수 있는 반성과 전망이 추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도록 배려한 김흥수와 김호걸화백의 누드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누드상에 대한 원형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이 주제 전을 압축한다. '추상과 구상의 하모니'를 추구해왔던 김흥수의 누드에서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시에서 누드화의 대상이 거의 여성이라는 사실은 재현주체가 재현대상에 대해 소유와 지배의 관계를 가진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김호걸의 작품은 엄격한 아카데미즘의 외양을 띠고 있어도 관객의 호색적인 눈길을 어떻게 감당할지 모를 만큼 탐스러운 여체의 향연을 보여준다. '리얼리즘' 부문에 포함된 이숙자는 푸른 보리밭 앞에 화장을 진하게 한 벌거벗은 여인이 베일을 둘러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달래꽃으로 국부를 약간 가린 신영진의 '꽃잎'이란 작품도 그렇고, 이 전시의 많은 여성누드가 성적 대상이라는 코드를 반복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각적 전통에 대해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란 명목으로 여성은 계속 꽃이나 과일, 요강단지, 나팔 따위로 나온다. 여러 방식으로 우회되어 있지만, 여성의 모습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연이나 상품화된 성적 오브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고정수의 '대지여, 넉넉한 그리움이여'는 제목부터 여성이 위치해야할 자리를 가리킨다. 전시공간을 도배한 성봉선의 작품은 그야말로 사각 틀에 갇혀 버린 (여)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에서 정보혁명에 의해 인간에 대한 관점이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는 현실을, 전자 미디어가 동원된 '영상매체와 이미지' 부문이 충족시켜 주길 기대하였으나, 여전히 '보여주기'의 패러다임 안에 갇혀있다. 전시 전체의 카테고리가 동어 반복적이다. 누드라는 기존의 강력한 상징질서, 요컨대 미리 세워진 질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백화점 식으로 나열된 항목들은 화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