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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색의 촉매자
나의 강의시간: 색의 촉매자
  • 오지섭 서강대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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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종교학을 인간 이해의 학문이라고 한다. 인문학 중에서 어느 것도 인간 이해의 학문 아닌 것이 없겠지만, 특히 종교학은 인간 삶의 궁극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인간 이해의 깊이가 남다르다고 자부한다. 종교학에서는 그 무엇인가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해나가는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적 삶을 조명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학 강의에서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고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인에게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을 망라하여 수없이 많은 인류의 종교 문화들을 섭렵하는 목적도 결국 인간의 삶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이다.

처음 나를 종교학으로 이끌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삶의 학문으로서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이끌었던 종교학의 그 매력을 다른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강의를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박사학위는 지난해에 겨우 끝마쳤지만, 선생님들의 배려로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박사학위를 마치면서 나 자신도 어느 정도 성장한 것일까, 지난해부터 강의에 임하는 나의 생각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는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흥분되었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준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었다. 학생들이 보여주는 호의적인 반응에 고무되어 스스로의 도취에 빠지기도 하고, 대학 강사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사실 이상의 자만심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박사학위를 마치면서 나 자신의 학문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되었고, 아울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조심스럽고 힘들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변화를 좋게 평가해 좀더 신중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 신중함은 바로 종교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특성과 의의를 새삼 절감하게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종교학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고, 따라서 종교학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과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종교학 강의 시간에는 실제적인 삶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럭저럭한 종교 관련 지식들을 요약 종합하여 전달해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종교 지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인간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충분한 해석과 사색을 유도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의 종교학 강의가 지식이나 정보의 제공자 역할을 했는지는 몰라도, 학생들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이끌어주는 사색의 '촉매자' 역할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한계와 문제는 아직까지 학문적 깊이를 이루지 못하고 강의 경력도 일천한 나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더욱 고민스러운 것은 나 자신의 학문적 역량, 학자로서의 자질이 과연 그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느냐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 옛날 나를 '삶의 학문 종교학'으로 이끌어주셨던 나의 선생님들처럼 과연 나도 나의 학생들에게 종교학을 살아있는 학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을지? 오늘도 그렇게 해보리라는 각오로 강의실을 들어서지만, 강의실을 나올 때면 또 다시 그 한계를 절감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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