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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울 때와 처음 가는 길
처음 배울 때와 처음 가는 길
  • 권영완 고려대 연구교수·KU-KIST 융합대학원
  • 승인 2018.12.1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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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권영완 고려대 연구교수·KU-KIST 융합대학원

지난 2011년 1월 슬로베니아 마리보르라는 곳에서 열린 유럽액정학회에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초청연사로서 간 적이 있다. 처음 가본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 마리보르는 조용하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학회가 열리는 하박국 호텔은 포호르예(pohorje)산맥 중턱쯤 위치했는데 호텔 위쪽으로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스키리조트가 있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학회에 참석하고 점심시간부터 오후 4시까지 스키를 타거나 개인 시간을 가졌다. 오후 4시부터는 다시 학회를 시작해 저녁 8시에 마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하박국 호텔에서 조금 더 아래쪽에 있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같은 학회에 참석한 영국 셰필드 대학의 Ungar Goran 교수와 아침 식사시간이 같아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점심 이후 시간에 스키를 타지 않을 거냐?”라는 질문에 “나는 스키를 탈 줄 모른다”고 했더니 “뭐든지 인생에서 처음 배우고 시작할 때가 있다. 다른 것들도 우리가 언젠가 처음 배웠고,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도 하고 있다”면서 “지금 스키를 배우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바로 위에 스키장이 있었고 아주 작은 꼬마부터 나이 드신 어른들까지 이른 아침부터 스키장에 달려가 하루종일 즐기는 것을 구경만 하면서 ‘나는 할 줄 모르니까’하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나에게 그의 말이 매우 강하게 다가왔다.

나중에 Ungar Goran 교수는 그동안 논문이 1만회 이상 인용됐고 h-지수가 51로 노벨상급에 해당하는 분이고, 작년 국제 순수응용화학 연맹(IUPAC)에서 신재료와 합성에 관한 업적으로 2017 Distinguished Award를 받은 해당 분야의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작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난 해본 적이 없어! 잘 될까?’ 같은 생각이 많아진다. 바로 옆에 가까이 있어도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으면 시도해보기 어렵다. 그런데 어린아이일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감이 없고 오히려 궁금해하고 뭐든지 해보고 싶어 한다. 특히, 연구자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하는 것에 아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연구비의 대부분은 국민의 세금이다. 그만큼 그 연구결과가 수혜자인 우리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세계인의 삶에 이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이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연구시설과 장비 없이 연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가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국가든 그 국가의 4% 이내 인재들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구자들은 우리 국민 중 4%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배우고 시도해야 하는 연구도 있고, 처음 시도하고 개척해야 하는 분야의 연구도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 과감성 그리고 실행력 등이 필요하다. 이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들이 도전해 일군 연구 성과들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데 사용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필자는 유기고분자 자성체 연구를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아래 수행한다. 유기고분자 물질은 전도체, 반도체, 발광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연구개발 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절연체라고 생각했던 고분자 물질이 전기전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전도체, 반도체, 발광체 등의 분야에서 엄청난 과학의 기술적 진보가 이뤄졌다. 이런 맥락에서 개발된 유기발광소자는 디스플레이로서 상업화돼 우리나라 경제와 우리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아직 개척 안 된 분야가 유기고분자 자성체의 연구다. 1960년대 이후 세계 수많은 연구자가 도전했으나 아직 확실히 고지를 점령했다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 연구를 해오고 있다.

아무도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가보지 않았고 처음 가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새로운 등반 루트를 뚫기 위해 산을 오른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목표지점에 도달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도전하는 데에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연구자가 가는 인생길도 같을 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그리고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시도,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오늘도 열심히 뛰는 분들을 위해 파이팅을 외친다.
 

 

권영완 고려대 연구교수·KU-KIST 융합대학원
고려대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기고분자 자성체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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