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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교육과 국가경쟁력
영어교육과 국가경쟁력
  • 서홍원 연세대·영문과
  • 승인 2018.12.1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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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The Guardian지는 2013년 12월 10일자에 “언어능력 부재가 영국에서 연간 480억 파운드의 손해를 일으킨다”(Language skills deficit costs the UK £48bn a year)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영국인들의 부족한 언어능력이 다국적 환경에서 큰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데, 특히 수출을 하지 못하는 영국 기업의 62%가 언어를 주 장벽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영국 상공회의소의 의견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영어는 이미 세계공용어(lingua fraca)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영국에서조차 타 언어에 대한 능력 부족으로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입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국가의 경제적인 손실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난해 발표된 한 글로벌 영어교육회사의 통계에 의하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88개 국가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영어능력 수치는 31위이다. 지역적으로 봤을 때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중동 순으로 영어능력의 순위를 보이는데 국가와 지역의 영어능력은 국가경쟁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권에서 한국은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 홍콩 다음으로 6위에 있다. 아시아 상위 4위까지는 영어를 국가공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5위 홍콩 역시 중국에 통합되기 전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영어가 모국어나 공용어가 아닌 아시아 국가 중에서 한국이 1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이뤄왔던 우리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이 수치 역시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의 국가경쟁력은 다년간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글로벌경제에서 한국의 기업의 역할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가진 능력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언어와 기업경쟁력의 상관관계를 다년간 연구한 체달 닐리(Tsedal Neeley)는 2016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로버트 카플란과 공저한 글에서 해외법인을 둔 기업의 임원들에게 외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외국어 능력이 향상되면 현지직원의 질이 향상되고, 본사 파견직원과 현지직원과의 소통이 원활해지며, 현지시장에서의 기업 입지가 확고해질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현지법인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HBR 2016년 9월호). 우리는 국가경쟁력과 언어와의 관계를 외국 기술과 문물을 수용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여타 글로벌 기업들처럼 ‘본사’의 입장에서 현지법인들과 소통해야 하는 환경에 접어들었다. 세계공용어인 영어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영어교육의 동력이 둔화되고 있다. 그 이유 두 가지를 주목해보자. 하나는 AI 시대에 번역이 다 해결해줄 것이므로 영어교육은 필요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이미 영어에 많이 노출되어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그 이상 영어교육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두 이유 모두 합당하지 않다.

2019 수능이 치러진 다음 날인 지난달 16일 서울경제신문에 “AI ‘2019 수능’ 풀었다...영어 12점·수학 16점”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결과는(예상대로) 실망스러웠다. 중요한 내용을 다루는 소통 과정에서 AI에 의지하기에는 아직 30년 정도 남았다는 것이 가장 낙관적인 전망이다. 설사 비슷한 수준의 언어능력을 구사하는 AI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검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막대한 손실, 생명의 위협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초중고 학생들은 과연 영어에 대한 노출이 많아서 더 이상 영어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 대학교는 2010년부터 8년간 입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말하기, 글쓰기 진단시험을 실시하고 수준에 맞게 분반을 배정해왔는데 매년 65%~70%의 학생이 유럽공동체 기준(Common European Framework of Reference)으로 볼 때 A2부터 B1급으로 판정되었다. 둘 중 더 높은 B1은, 어느 정도 소통은 이뤄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소통에 성공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말하기, 글쓰기에서만 학생들의 영어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대학생들은 번역본이 아닌 영어 원서와 연구논문을 직접 읽으면서 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문 독해 위주로 대입을 준비해온 학생들은 정교한 논리로 전개되는 원서나 논문을 해독할 능력이 부족하다.

앞서 언급한 닐리 교수는 글로벌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을 잘할 만한 사람을 일단 채용해서 언어교육을 집중적으로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삼성그룹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펴서 해외 파견 인력을 선발해온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언어교육을 집중적으로 시키기 위해서라도 기초는 단단해야 한다. 유치원 때부터 학원에서 하루에 100단어씩 외우게 해준다고 학부모를 현혹시키는, 그리고 현혹되는 환경에서는 이런 기초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라면 유치원생이 20일 만에 2,000단어를 알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교육부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요구하는 총 단어 수에 버금간다. 어려운 단어일수록 오히려 사용하기 쉽다. 그러나 동사 have 같은 단어를 5초만에 외웠다고 해서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않다. 

1997년에 폴 네이션은 빈도수가 높은 상위 2,000개 영어단어가 영어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혔다. 달리 말하면 교육부에서 지정한 2,000여개의 단어만 외워도 영어의 80%를 알아듣고 그에 맞춰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영영 사전에서 단어 정의에 사용되는 핵심 단어의 수가 모두 합쳐 2000개 안팎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10,000 단어 수준으로 외워야 풀 수 있는 시험을 치르고도 영어 소통에 실패하는 학생들이 무려 70%에 가까운 이유가 무엇일까? 영어의 80%를 차지하는 핵심 단어, 쉬운 단어를 마스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Have와 같은 쉬운 단어는 마스터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번 마스터하면 사용하는 법을 잊게 되지 않는다. 이는 수영을 배우고 나서 십년 후에 다시 수영을 해도 헤엄칠 수 있는 이치와 유사하다.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쉬운 300-500 단어를 마스터해서 강한 토대를 다지고, 대학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교육부 지정 2000단어 안팎으로 많은 읽기와 듣기, 말하기, 쓰기를 훈련한 후, 대학에서 학술적, 전문적 용어를 가속화하여 배우면 닐리 교수가 기대하는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출발할 것이다. 이런 탄탄한 토대 위에서 기업이나 연구소, 대학 등지에서 세부 분야에 대한 전문영어를 습득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영어교육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담론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우리 영어교육의 목표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것만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의 편의점에서 마음 졸이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는 언어능력도 국가경쟁력이 된다. 외국인 학생들과 활발하게 영어로 교류하고 토론하는 것도 국가경쟁력이다. 무엇보다도 진짜 경쟁력은 전문분야에서 생길 것이다.
 

 

서홍원 연세대·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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