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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두 시간씩 꾸준히 공부하게”
“하루에 한두 시간씩 꾸준히 공부하게”
  •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 승인 2018.12.0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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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스승 10. 스승 쉬른 교수의 마지막 가르침
Prof. Carl Georg Schirren(1923~1968)
Prof. Carl Georg Schirren(1923~1968)

내가 피부과를 전공하게 된 것은 쉬른(Carl Georg Schirren, 1923~1968) 교수님 덕분이다. 인턴 때 나는 ‘전공 과정을 어느 대학으로 가서 할까?’, ‘무슨 과를 택할까?’ 하는 두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쉬른 교수님에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시 독일은 국가고시를 구두로 치렀다. 학생 4명이 한 조로 두세 시간 구두시험을 보는데, 내 첫 과목 시험관이 바로 쉬른 교수님이었다. 그 쉬른 교수님이 나를 기억하고 부르신 것이다. 쉬른 교수님은 나를 만나자 전공 관련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셨다.

“저는 생화학 같은 기초 의학이나 내과학을 전공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렇게 제안하셨다. “자네 피부과를 공부하지 않겠나? 나한테 와서 피부과 전문의 과정을 밟으며 피부 관련 생화학 연구도 함께 해 보게.”

그렇게 피부방사선치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이신 쉬른 교수님 밑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하고 서너 달이 되었을 무렵, 교수님께서 갑자기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몇 달 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나는 지도교수를 잃어버렸다는 막막함보다 젊은 분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간암은 발병 및 진단을 받고 몇 달이면 사망에 이르지만, 영면 전까지는 맑은 정신으로 지내는 게 보통이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쉬른 교수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말씀하셨다. “내가 자네를 내 밑으로 오라고 해놓고는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해 마음이 무겁네.” 나는 “교수님, 저는 이제 시작이라 괜찮습니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요즘은 어찌 지내나?” “지금은 피부과 초년생이기 때문에 하루 두 시간 정도 피부조직검사표본(Dermatohistopathology slide)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봅니다. 그걸 이해하면 피부를 더 잘 이해할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네. 피부조직을 통해 피부를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지.” “그럼 시간은 어떻게 내나?” “만사 제쳐놓고 공부합니다.” “그래, 잘하고 있네. 앞으로도 하루에 한두 시간씩 꾸준히 공부하게. 한 시간이면 전문 서적 10쪽은 읽지 않겠나? 그 10쪽이 열흘이면 100쪽이 되고 100일이면 1,000쪽이 되겠지? 그렇게 1년이 모이면 얼마가 되겠나? 그것이 자네의 경쟁력이 될 걸세.”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다른 동료가 쉴 때 자네도 쉬고, 동료가 잘 때 자네도 잔다면, 자네의 경쟁력은 차별되지 아니하겠지?”하셨다.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새기며 병실을 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도 실천하고 있다. 대학교에 있을 때는 매일 30~60분 먼저 출근해 책을 읽었다.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총장으로 재직할 때도 변함없이 지켜온 나와의 약속이었다. 

2008년 쉬른 교수님의 미망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필자가 1968년 피부과 전문의 과정을 시작한 ‘마르부르크(Marburg) 피부전문대학병원’ 개원 100주년 행사에 즈음해 여러 명사가 함께하는 기념식에서 스승이신 쉬른 교수님을 추모하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며 필자를 초대한 것이다. 당시 필자는 가천의과학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터라 졸업식과 겹쳐 추모식에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고인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 달라고 청하셨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사모님께서 잘 아시겠지만, 저는 쉬른 교수님의 큰 배려로 피부과학에 입문하였습니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교수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르부르크에서 1968년 피부과학 전공을 시작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그분을 가까운 거리에서 뵈면서 인간으로서의 넉넉함과 제게 가르쳐주신 귀중한 가치를 가슴에 품고 마음의 소산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모님,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매일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독서를 하거나 일을 더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제 ‘일과의 흐름’으로 굳게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승 쉬른 교수님을 통하여 피부과학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제 인생의 ‘삶의 으뜸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수로서 자랑스러운 제자들과 함께하고, 대학교의 총장직을 수행하고, 국제베체트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제 스승이신 쉬른 교수님께서 주신 그 각별한 마지막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큰 고마움을 전하는 이유입니다.“

내 추모의 글은 피부과 교수가 된 아들이 낭독했고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병고로 죽음을 앞둔 스승께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나에게 큰 가르침을 남겨주셨다. 그리고 지도교수 없이 혼자 남게 된 나를 걱정해 프랑크푸르트 대학 피부과의 동료인 나세만(Theodor Nasemann) 주임교수께 제자가 시작한 전공을 계속할 수 있도록 부탁까지 해주셨다.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도 그렇게 제자의 길을 열어주고 책임져주셨던 것이다. 스승의 제자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가슴에 품어본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뮌헨의대를 졸업하고 프랑크푸르트대, 연세대 의과대에서 가르쳤다.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대 명예총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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