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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 본다, 대학과 학문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본다, 대학과 학문의 역할을
  • 류근조 중앙대 명예교수·시인
  • 승인 2018.11.19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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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대학을 상징해 온 상아탑이란 말은 사전에서 보면 예술지상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정숙한 예술을 즐기는 경지, 혹은 현실도피적인 관념적인 학구생활이라 쓰여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같은 사전적인 뜻을 아무리 융통성 있는 전이(轉移) 개념으로 사용한다 해도 도무지 그 과녁이 맞지 않는 사어死語가 돼 버린 느낌을 받는 것은 웬일일까.

일찍이 철학자 ‘야스퍼스’는 대학의 기능으로 첫째는 직업적 지식을 가르치는 전문학교로서의 기능, 둘째는 인간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 셋째로 순수한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든 적이 있다. 이는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목적이 첫째는 직업을 갖기 위한 방편, 둘째는 인격완성, 셋째는 진리(Wissenschaft) 탐구에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학문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시대엔 보편적 근원(Arche)으로서의 지(知), 어떠한 실제적 이해관계도 초탈한 순수한 이론적 태도에 따르는 정복(淨福)을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 목적이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존 듀이’ 등에 의해 소위 실용주의(Pragmatism)가 주창되면서부터 학문이 순수성 일변도를 지향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의 대학 지원 경향을 보면 반드시 현재 인류사회가 당면한 '인간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 결과 급속도로 과학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물질세계를 이룩해 인류가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학의 발달로 인한 물질적 팽창은 인간을 경시하는 정신의 빈곤을 초래해 마침내 인류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또 하나 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젠 옛날처럼 학문은 신의 시녀 노릇을 한다든가 또는 과학의 발달만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국내의 대학 지원 경향을 보면 반드시 현재 인류사회가 당면한 이 같은 학문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야스퍼스’가 말한 대학의 기능 중에서 인격완성이나 진리탐구는 오히려 뒷전에 제쳐놓고 오직 현실 생활의 이익을 도모하는 쪽으로 그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적성이나 능력, 국가적 차원의 인력배분 현황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들이 가니깐 나도 간다는 식의 소위 합리성 없는 인기 편중의 선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학문의 참다운 목적은 진리탐구에 있다고 본다. 당장은 효용성이 없다 하더라도 정말 그것이 본질적으로 합리성과 실증성이 있는 진리라면 장구한 안목으로 볼 때는 그것이 곧 실용적인 면에서도 가치성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처음 아인슈타인이 내세운 주관적 시간관과 공간관이, 뒷날 상대성의 원리 기반이 돼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뒤엎고 원자탄을 생산해 낼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현대물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온 양자이론(量子理論)이 원자탄을 만들어 인류를 해치는 흉악한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죄의식을 가졌었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얘기도 있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학문의 최대 과제는 인간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응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양심적 자유를 확보하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것이 학문 자체를 인간학(人間學)과 동일시하기 시작한 내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확실히 오늘날 학문이 안고 있는 절실한 고민이 있다면 최첨단의 과학적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지만, 한편으론 현재 이것을 사용할 가치관이 결여돼 있거나 불확실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안다는 것은 과학기술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뜻하므로 학문하는 자는 허위의 세계로 유혹당하지 않도록 꾸준히 방어하고 노력해야 한다. 학문이란 광대무변한 자유의 세계라는 연구영역 속에서 참된 것, 올바른 것, 확실한 것만을 선택해야 할 제한된 활동”이라고 한 어느 석학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좀 더 부연하면 학문이란 “인류를 비인간화로 치닫게 하는 현대의 악의 원인이 무엇이며, 또 구체적으로 공존공영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할 수 있는 사회적 지성의 체계를 세우는 일”이 된다. 이것은 학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학문 적용에 부수된 방법론이 학문의 영역에 편입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학문을 주도해야 하는 기관이 대학이기 때문에 이상의 학문적 과제는 곧 대학의 과제가 된다. 또한 여기서 학문 적용에 부수된 방법론이란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 자신의 양심에 관계되기 때문에 현대에 있어서도 대학이 권위와 자유가 보장돼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까지 필자 나름의 인간행복을 위한 학문론을 펼쳤다. 한마디로 현대 학문이 안고 있는 인간회복의 측면을 역설한 셈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상과 같은 개연적(蓋然的)인 학문의 성격이나 범주의 규정보다는 대학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대학이 학습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다룰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런데 대학은 하부구조의 교육기관이 담당했던 일반적으로 인정된 지식만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고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까지 해야 하므로 특별히 자생적인 힘과 자율성이 요청될 뿐만 아니라, 여기에도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자유가 보장돼야 하는 소이가 있다.

어떤 의미에선 대학이란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기보다는 자기에게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도량(道場)이라고 하는 말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외국에서 적용한다는 ‘튜터리즘제’ 같은 방법도 사실은 연구능력을 길러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스스로 학문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방법론이 섰다는 것은 자기분야에서 적어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현대 학문이 인간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또 유아독존적(唯我獨尊的)이 아니라 인류공동의 유대 속에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목표로 한다면 대학은 그런 기능 발휘를 위해 먼저 그 대학이 소속해 있는 지역이건 국가건 공동이익이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당연히 안 될 것이다.

류근조 중앙대 명예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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