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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의 횡포
‘성과’의 횡포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18.11.1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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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교육부의 ‘성과급적 연봉제 운영지침’이 하달되어, 국립대학 교수들의 성과급적 연봉 ‘評定’의 시간이 되었다. 상위 등급자의 규모를 축소하고 등급 간 지급액의 격차를 줄이자고 제안했더니, 힘 있는 교원은 동기부여 효과가 없다며 반대하고, 재능 있는 교원은 성과급제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반대한다. 성과급적 연봉제를 도입하며 교육부가 기대한 효과가 ‘교원의 자발적 동기 유발을 통한 교육·연구역량 향상 촉진’과 ‘국립대학 교원 사회에 발전적인 경쟁 풍토 조성’이었는데, 적어도 이 교원들에게서는 그 효과가 뚜렷하게 실현되었다고 할만하다. 

그런데 연봉 2~3백만 원의 차이가 자발적(!) 동기 유발 효과를 갖는다는 주장은 국립대학 교수들을 두 번 욕보이는 것이다. 성과급적 연봉제라는 것이 각 대학에 <교원 수 x 기준액>을 배정하고, 각 대학에서는 그 총액을 교수들끼리 성과에 따라 차등으로 나눠 갖게 만든 제도로 일종의 상호약탈적 ‘영합경기(zero-sum game)’이다. 교수들은 그 경기의 선수로 참가해서 몇 푼의 돈을 놓고 동료 교수들의 성과를 의심하며 아웅다웅해야 한다. 참가하기 싫다고 참가하지 않을 수 있는 경기가 아니다. 자발적이라니, 소가 웃을 이야기이다. 게다가 평가 결과가 절반에 가까운 교수들에게 강제하는 자괴감과 모욕감이, 또는 절반가량의 교수들에게 안겨주는 드러낼 수 없는 불편한 안도감이 교육과 연구 역량 향상을 촉진하는 동기를 유발할 것으로 믿는 것은 교수를 파블로프의 강아지쯤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한 일이다.

성과급제도가 ‘발전적인 경쟁 풍토 조성’의 효과를 낳는다는 주장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야기이다. 성과급을 제도로 확립한 테일러주의(Taylorism)가 ‘과학적 관리’라는 낯 뜨거운 이름을 앞세운 것과 다르지 않다. 테일러주의는 숙련을 해체하여 표준화하고 최적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작업조직 방식이다. 노동자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박탈당한 채 정해진 작업을 정해진 방식으로 단순 반복하고, 성과에 따라 차별적인 임금으로 보상을 받는다.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로 취급한다는 일반적인 비판은 제쳐놓더라도, 이런 제도를 본질적으로 표준화하고 최적화할 수 없는 교수들의 다양한 ‘전문지식노동’에는 도입할 수 없는 것이다. 국어국문학과를 예로 말하더라도, 문학과 어학의 연구자료, 연구방식, 연구성과가 다르고,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그것들이 다르다. 그러므로 성과에 따라 임금을 차별한다는 제도는 교수들의 노동에 관한 한 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게다가 테일러의 경쟁은 상호약탈적 ‘영합경기’가 아니라, 성과에 따라 임금 총액이 늘어나는 ‘정합경기(positive-sum game)’라는 것도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런 까닭에, 잘못 구상된 ‘영합경기’에 가담할 생각이 없는 교수들은 제도 도입 때부터 성과급적 연봉제 시행에 반대해 왔지만, 교육부를 앞세운 권력의 태도는 촛불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교원 사회에 발전적인 경쟁 풍토를 조성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은 대학과 학문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학적 관리가 그러하듯 경쟁 기제를 부과하여 대학과 교수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대학에서 그런 의도는 과잉으로 실현되고 있다. 학문 분야들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말살할 수밖에 없는 성과평가의 척도는 교수들의 다양한 전문지식노동을 등질화하고 수량화한다. 교수들은 성과 관리의 관점에서 획일적, 단선적으로 연구와 교육을 이해하고 실행하며 서로를 비교한다. 성과 점수의 담지자로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교수들은 ‘서로에게 늑대’가 되었고, 학문공동체 같은 진부한 용어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엉터리 국제학술지’, ‘엉터리 국제학술대회’ 추문은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런 실적 부풀리기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교수는 없다. 

누구도, 심지어 대학 총장들조차도, 이런 상황을 연구와 교육을 발전시키는 경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교원 사회에 발전적인 협력 풍토 조성’이라는 발상은 왜 하지 않는가. 교수들의 전문지식노동 실행에서 ‘경쟁’과 ‘협력’ 중 어느 것이 (더구나 융합과 혁신을 강조하는 시대에) 더 효과적인지 왜 따지지 않는가.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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