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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조선의 과학적 혁신을 가져온 사유의 결과물"
"한글, 조선의 과학적 혁신을 가져온 사유의 결과물"
  • 편집국
  • 승인 2018.11.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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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한글과 과학문명』(최경봉·시정곤 저, 들녘 刊) 낸 시정곤 KAIST 교수(인문사회과학부)

우리말 교양서를 꾸준히 내오고 있는 국문학자 시정곤 교수가 이번에는 최경봉 원광대 교수와 함께 『한글과 과학문명』을 펴냈다. 과학문명사적 흐름에서 한글의 위상과 역할 변화를 모색한 책으로 한글 탄생의 시대적 배경, 15세기 조선의 과학문명과 한글, 한글 확산과 문명 발전, 한글과 근대 과학문명을 다뤘다. KAIST에서 30년 동안 언어학을 강의하며, 융합연구를 실천해온 시정곤 교수는 누구보다 한글의 우수함에 자부심을 느끼는 언어학자다. 한글과 한국어를 사랑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시교수의 한글 예찬론을 한번 들어보자.

시정곤 KAIST·인문사회과학부.
고려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 언어학과 객원연구원, 영국 런던대학 SOAS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말의 수수께끼』,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공저), 『현대국어 형태론의 탐구』,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조선언문실록』, 『훈민정음을 사랑한 변호사 박승빈』 등이 있다. 

▲ 15세기에 한글이 탄생하게 된 국내외적 역사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15세기 조선에서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 문자보다 체계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문자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첫째, 조선 초기 주변 나라에 이미 다양한 방식의 문자가 존재했다는 점과 둘째, 이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이 높았다는 점, 셋째, 한자문화권의 철학을 우리식으로 수용하여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소문자를 창제할 수 있었던 자신감과 문화적 역량을 들 수 있습니다."

▲ 당시 일본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이미 독자적인 문자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문자 창제에 늦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고유문자 등장이 늦어졌다기보다는 더욱 체계적이고 발달된 문자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인접 국가의 문자는 대부분 한자를 변형하는 수준이었거나 일본의 가나문자처럼 한자의 약자를 활용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들과 한글은 차원이 다른 문자입니다. 한글은 한자의 자형에서 탈피하고 발음기관을 상형한 독창적인 방식으로 만든 새로운 표음문자(表音文字)이자 음소문자(音素文字)로서 더욱 발달된 문자로 탄생한 것입니다."

▲ 한글 창제 이전에도 이두나 구결 등 우리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종대왕이 아니더라도 한글은 만들어졌을 거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세종대왕이었기에 한글 창제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은 직접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였습니다. 중국의 성운학에 정통했었고, 우리만의 음운학을 정립할 만큼 언어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세종은 주변 문자를 참조하고 각 문자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완벽에 가까운 독창적인 음소문자 한글을 만든 것입니다."

▲ 훈민정음 창제의 의도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최만리와 같은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원래 목적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크게 세 가지로, 첫째는 애민정신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문자를 알지 못해 겪는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쉬운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둘째는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조선한자음과 중국한자음의 표준을 정립하고 이를 표기하는 발음기호로 한글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셋째는 백성들에게 충효와 같은 유교사상을 교화하여 성리학적 질서를 뿌리내리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 한국 과학문명사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할 때 한글의 제자 원리에 내포된 ‘성리학적 과학주의’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존 연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타난 언어학과 언어철학 및 운서 연구 등이 『성리대전』 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맥을 같이 하고, 자모의 분류 및 배치 체계 등이 중국 운서의 그것과 닿아있다거나 한글의 오음과 음양 등의 구조가 말소리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를 하나로 보는 성리학적 세계관과 연관된다는 견해는 있었습니다. 한편 좀 더 거시적으로는 ‘성리학적 과학주의’란 15세기 조선의 규범을 관통하고 있던 성리학적 사유체계(思惟體系)를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살아가는 준거(準據)였고 과학적 사유 방식의 혁신을 가져온 사유의 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은 사회, 정치, 문화, 과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조선만의 새로운 표준을 확립하려 한 시기로 봅니다. 그리고 한글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 사실 우리말 발음과 한글 표기는 잘 맞지 않습니다. '꽃잎'이라고 쓰고 글자에 없는 [ㄴ](꼰닙) 발음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외국의 일부 한국어 학자들은 한글은 읽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한글을 과학적이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한글이 정말 우수한 글자가 맞는지, 우리 민족만이 가지는 자부심에 불과한 건지 궁금합니다. 
"‘꽃잎’의 예를 드셨는데, 이것은 소리와 문자의 대응관계라기보다는 변동규칙으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의 경우 [머거요]라고 소리가 나지만 소리나는 대로 ‘머거요’라고 쓰면 틀리지요. 그러나 이것은 소리와 문자의 대응관계가 아니라 ‘머거요’를 ‘먹어요’로 다시 바꾸어 주는 문법의 단계(형태음운 변동규칙)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핵심은 [머거요]로 소리나는 것을 ‘머거요’로 그대로 적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거요]라는 소리를 ‘메거요’나 ‘마거요’나 ‘머거이요’나 ‘머가요’ 등으로 쓰지 않지요. 반면에 영어의 경우를 보면 [nais]라는 소리를 들으면 ‘nais, naice, nays, nis, nice’ 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글은 소리를 문자로 잘 담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글의 우수성은 우리민족만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질문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한글에 대한 평가는 더욱 높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한글의 위상이 영어(로마알파벳)에 가려 낮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언어학자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기본 문자를 만들고 기본자를 중심으로 조음방법에 따라 가획하면서 소리의 성질을 표시한 독창적인 방법으로 창제된 문자라고 하면서 음소문자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자질문자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 신조어를 통한 외래어 유입은 막을 수 없습니다. 단어는 자연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데, 국립국어원에서 펼치는 인위적인 언어순화 작업은 과연 필요한 것인가요? 그리고 최근 인터넷에 나타나는 줄임말이나 맞춤법 파괴 현상으로 논란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 제언시다면요?
"말씀대로 말의 생성과 소멸은 자연적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질서나 원만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일정한 약속과 규범이 필요합니다. 언어순화작업도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이를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을 고려해볼 필요도 있겠지요. 인터넷 줄임말이나 신조어 등은 세대 간 소통에 장애가 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 지금까지 정주리, 최경봉, 고(故) 박영준 교수 등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쉽게 풀어쓴 일련의 한글 대중서를 꾸준히 펴내오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나 의도가 있습니까? 하나의 팀으로 불리기도 하는 공동연구자들 간의 지적 교우관계는 어떤가요?
"말과 글은 우리 삶 속에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데도 사람들은 말과 글을 어렵고 딱딱하게만 여기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대중들에게 관심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말과 글에 담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알려드리고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네 명이서 호흡이 잘 맞아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면서 하나의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늘 즐거웠습니다."
 
▲ 앞으로의 연구계획이나 집필계획이 궁금합니다.
"아직 구체적인 집필계획은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우리말과 글을 대중들에게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앞으로는 문자가 아닌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말의 소리나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단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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