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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니체가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은 이유
‘보헤미안 랩소디’, 니체가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은 이유
  • 문광호 기자
  • 승인 2018.11.07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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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보헤미안 랩소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포스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감정의 동요 없이 스토리의 줄기를 잡아가며 영화의 골격을 짚어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때로는 거리두기에 실패하는 영화들도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나를 그야말로 ‘흔들어‘놓았다.

퀸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내게 ‘퀸도 모르냐’는 친구의 조소 섞인 도발은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아까울 정도로 퀸의 음악을 마구잡이로 들어댔다. 비틀즈와 레드 재플린을 들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세련되고 감동적이지만 다소 먼 나라 이야기 같던 비틀즈보다는 기타의 강렬한 사운드와 프레디 머큐리의 야성적인 목소리가 살아있던 퀸의 음악이 더 가슴 뛰었다.

하지만 음악을 음악 이상으로 듣지 못했던 나는 음악이 주는 감동을 도무지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의 보컬에 대한 찬사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때도 나는 그것을 가슴 깊이 공감하지는 못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부적응자, 프레디 머큐리

그런 내게 「보헤미안 랩소디」는 잊고 있던 감동을 일깨웠다. 이 영화는 퀸의 음악을 사랑해마지 않는 이들에게 왜 우리가 그들의 음악에 가슴이 뛰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영화에서 퀸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부적응자들(Misfits)을 위한 음악을 만드는 부적응자들. 파키스탄 출신이라고 놀림받지만 실은 인도계 잔지바르(지금의 탄자니아) 태생의 프레디 머큐리는 철저한 사회의 부적응자다. “좋은 말, 좋은 생각, 좋은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아버지의 기대와 사회적 편견과 무시 속에 공항에서 짐을 날라야 했던 현실 사이의 간극은 긍정과 부정 어느 쪽이든 프레디 머큐리를 끝에 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끝내 스스로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에나 지금이나 공공연한 그의 성적 취향이나 에이즈라는 불치병은 성공 이후에도 그를 사회의 부적응자로 남게 만든다. 그와 음악을 함께 하는 멤버들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성공을 차근차근 만끽하는 모습은 프레디의 삶과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그의 부적응을 더욱 부각시킨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프레디가 니체에게 바치는 헌사

영화는 그런 프레디가 왜 음악을 탈출구로 선택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삶을 부지런히 조명하는 속에서 관중이 스스로 답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야 프레디는 말한다. “나는 에이즈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건 싫어. 나는 음악가(Performer)야.”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속에 아득해지는 프레디의 시선은 비단 약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을 표현하고 있지만은 않다. 사회적인 평가와 비판으로부터 부단히 벗어나고자 했던 프레디는 그 장면에서 여러 갈래로 분열하며 삶 전체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는 자신의 출신과 성적 지향을 숨겼지만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파키스탄인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며 “여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분열하는 프레디의 모습은 엄격한 사회적 시선과 규율 속에 분해되는 자아상, 자신을 규정짓기를 거부하는 프레디의 저항을 반영한다.

그런 프레디에게서 기존의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 인간을 세우려했던, 그래서 신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떠올리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프레디 머큐리’는 “내가 누구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며 ‘여왕’을 밴드의 이름으로 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프레디 머큐리가 책 제목을 조로아스터(독일명 짜라투스투라)로부터 따온 니체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니체의 고향인 작센주는 보헤미아와 인접해 있다. 

모든 것을 부정한 후에 프레디 머큐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음악 하나뿐이다. 음악만이 프레디를 추동하는 힘이며 그를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스틸컷. We will rock you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모두 함께 발을 구르게 만드는 음악의 힘

따라서 오만하게도 사회 부적응자를 갈망했던 어린 시절의 나로서는 퀸의 음악이 좋은 이유를 결코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가진 것을 하나도 내려놓아본 적도 없으면서, 아니 빼앗겨본 적도 없으면서 그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그 얼마나 허망한가. 퀸은 몰락하는 자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몰락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진실에 직면하는 것을 죽음을 앞둔 그 순간까지 두려워하고 사랑 앞에서 너무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프레디 머큐리는 우리의 곁에서 함께 발을 구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잠시 상상해본다. 영화관의 관객들이 모두 “쿵쿵짝, 쿵쿵짝” 함께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는 광경을. 웸블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에이요~라고 외치는 순간의 감동을. 음악은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거기에는 더 이상 출신도, 성별도, 차별도 없다.

"내가 신을 믿는다면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니체는 말한다. 음악 앞에서는 신도, 인간도 모두 가진 것을 내려놓기 마련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퀸의 음악에 한 번이라도 가슴이 뛰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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