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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살다 나무에 묻히다
나무와 살다 나무에 묻히다
  •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 승인 2018.10.0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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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1-② 천리포 수목원의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나무와 결혼, <천리포 수목원>을 돌보다
 
미국 펜실베니아 태생인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2002)는 1945년 미군 정보장교로 한국에 왔다가 1979년 민병갈(閔丙?)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했다. 아마도 밀러를 ‘민’, 칼을 ‘갈’, 페리스를 ‘병’으로 옮겼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갈’이란 한자는 물이 깊고 넓거나 맑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가 천리포로 왔을까. 내용은 이랬다. 1950년대 말 한국은행 고문직에 있을 때였다. 여름휴가 때면 으레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았는데, 낙조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1962년 여름, 천리포에서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민병갈이 만리포를 찾았다가 이웃해 있는 천리포로 산책을 갔을 때였다. 마침 마을 노인으로부터 딸의 혼수비용이 필요하니 자신의 야산 6,000평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은행에 다니고 믿음직하여 청을 들어줄까 생각했던 탓일까. 의외의 부탁이지만 민병갈은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돕는 셈 치고 그것을 샀단다. 그 야산 6,000평이 지금의 18만여 평 수목원을 이룬 단초였는데, 글쎄, 당시 한 미국인이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가난했던 천리포 주민들이 들썩였다. 땅 주인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땅도 사 달라며 찾아와 졸라댔다. 그 이듬해부터 그는 황폐한 땅들을 조금씩 사들여, 1966년 말에 1만 9,000평, 1970년에는 드디어 천리포를 아담한 자연동산으로 꾸밀 각오를 한다. 이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수목원이 탄생한다. 수목원장 민병갈은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2002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며,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나무와 결혼하여 살았고, 자식 대신 수많은 나무를 길렀다. 그게 혈육이었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국내 수목 가운데 희귀종과 자생종을 수집했다. 특히 ‘호랑가시나무, 목련, 단풍나무, 동백, 무궁화’ 이 다섯 가지에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 가운데 호랑가시나무와 목련을 가장 아꼈다 한다. 그가 수집한 목련나무의 경우, 무려 700여 종이라니, 놀랍다. 목련의 계절에, 700의 향기와 빛깔로 눈 떠는 무량한 생명을 만나고 싶다. 

민병길 기념 흉상과 그가 묻힌 나무
민병길 기념 흉상과 그가 묻힌 나무

민병갈 사후, 식물원 측은 식물전공자나 후원자에게만 공개해왔지만, 2009년 생태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반인에도 개방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천리포 수목원이 소유한 7개 구역 중 한 곳, 즉 민병갈의 이름을 딴 ‘밀러가든’(Miller’s Garden) 뿐이다. 그나마 일부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천리포 수목원은 일부가 해변에 맞닿아 있다. 한국적인 것을 아끼고 사랑하던 그는 초가집과 논이 어우러진 풍경을 특히 좋아했으며 수목원 내부에는 해변을 따라 트레킹 코스인 ‘노을길’이 조성돼 있다. 파도소리, 새소리, 낙조…. 민병갈도 들었을 그 자연의 음악과 색조를 우리도 놓칠 순 없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면 ‘낭새섬’이 보인다. 민병갈은 수목원 낭떠러지에 둥지를 틀고 살았던 낭새(=바다직박구리)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 섬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는데, 오지 않는 것일수록, 더 그리워지는 법.

“내가 죽거든…묘 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어라”  
 
현재 명명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 수목원>에 들어서면, 무엇보다도 다음의 4종 세트를 놓쳐선 안 된다 : (1) ‘고 민병갈의 흉상’, 그 바로 앞에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2) ‘개구리 조각’, 그 오른쪽 옆에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3) ‘완도호랑가시나무’, 그리고 맨 앞쪽 오른쪽의 (4) ‘민병갈 목련’(태산목 리틀잼).

민병갈은 그가 사랑했던 목련(‘민병갈 목련’) 밑에 묻혀있다. 저 세상에 가면 <천리포 수목원>의 개구리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던 그의 꿈을 받들어 흉상 옆에 작은 개구리 조각을 두었다. 그의 삶은, 이렇게 단순화, 추상화되어 간결한 의미로 환생해 있다. 쭈욱 지켜보니, 참 아쉽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이런 저런 나무 설명에만 몰두하고, 그가 살았던 삶의 의미를 스윽 지나쳐버리고 만다.

민 원장은 생전에 “내가 죽거든 묘 쓰지 마라, 묘 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어라”라고 당부했단다. 그게 유언이었는데, 수목원 직원들은 차마 묘를 쓰지 않을 수 없어 수목원 내 비공개 지역에 그를 일단 묻어두었다. 그 10년 뒤, 시신을 수습해 뼛가루를 ‘민병갈 목련’이라 부르는 ‘태산목 리틀잼’ 아래 다시 묻었다.

민병갈의 주민등록증
민병갈의 주민등록증

민병갈이 묻힌 ‘민병갈 목련’에서, 마치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의 후박나무 아래, ‘법정스님 계신 곳’에서 느꼈던 나무의 인자함, 사람의 체온이 배인 듯 술렁술렁 나뭇잎의 흔들림이 내 맥박처럼 느껴졌다.

나무는 우직하다. 민병갈처럼, 아니 민병갈이 사랑했던 개구리처럼, 개구리를 닮은 한국인처럼. 민병갈이 개구리를 좋아하셨던 이유가 있다. “끔뻑거리는 개구리의 두 눈은 굉장히 느려 보여요. 그러다 상황이 급해지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순하고 착한데 시련이 닥치면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일 하잖아요. 개구리가 그 모습을 닮았다니까요! 난 한국 사람들 닮은 건 무엇이든지 좋아해요.”(<민병갈 기념관> 전시물 글 가운데서)”

너른 연못을 배경으로 지어진 <민병갈 기념관 & 밀러가든 갤러리>의 2층에는 민병갈을 기념하는 전시물들이 있다. 그 가운데 정갈하게 기록한 일기, 한글을 열심히 공부한 흔적, 틈틈 수집해 둔 한국인들의 화투, 그가 사용한 명함이나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참 아쉽다. 어디에도 민병갈 관련 책자를 파는 곳이 없다. 기념관에도 기념품 가게에도.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 ‘신두리 사구(沙丘)’ 모래언덕에서

천리포를 떠나, 돌아오는 길에 국내 최대 모래언덕 ‘신두리 사구(沙丘)’에 들렀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멀리 않은 곳이다. 편안한 모래언덕. 아, 언덕이라!

신두리 사구
신두리 사구

언덕은 어딘가를 ‘바라보는 곳’이고 또 ‘무언가-누군가를 기다리는 곳’이다. 더 높아지면 우뚝 솟은 산꼭대기일 거고, 더 낮아지면 평지일 거다. 그저 적당한. 높지만 그렇게 높지도 않고. 약간 낮지만 그렇게 낮지도 않은, 심리적으로 평온한, 불안하지 않은 장소-지점이 언덕이다. ‘전망’과 ‘여망·기대·기다림’에 알맞은, ‘경계(警戒)’, ‘주의(注意)·집중(集中)’에서 유리한 곳이다. 삶의 온갖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안정된 공간의 확보는 인간이 생존 본능에서 익힌 환경-터-풍수-위상학적 지혜일 것이다.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사랑[仁]을 찾아서 도달하는 곳이 언덕이고, 무덤이다. 모두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상」에 재미있는 대목이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음악은 그 저절로 생겨나는 바를 즐거워하는 것이고(樂樂其所自生), 예는 근본(=자신을 있게 한 선조)을 잊지 않는 것이다(禮不忘其本). 옛사람의 속담에는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을 바로 향하는 것은 인[仁. 어짊=삶의 초심을 잊지 않는 마음]이다(狐死正丘首, 仁也).”라고 하였다” 생명의 원초를 드러내는 ‘악(樂)’, 자신의 뿌리에 대한 경의의 표현인 예(禮)처럼, 삶(생명)의 초심을 잊지 않는 마음인 ‘인(仁)’을 나열한 것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유행가 ‘찔레꽃’의 가사 앞 대목이다. ‘남쪽∼고향∼언덕∼초가삼간∼그리움’, 이런 낱말로 짜여 있다. 또 하나 더 있다. “실버들 늘어진 언덕위에 집을 짓고 정든 님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 세상살이 무정해도 비바람 몰아쳐도 정이 든 내 고향 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 수 없네.” 유행가 ‘초가삼간’의 가사이다. ‘실버들∼늘어짐∼언덕∼정듦∼님∼초가삼간∼오막살이’라는 낱말로 돼 있다. ‘언덕+초가삼간’ 세트는, 명절 선물세트처럼, 참 특이한 조합의 ‘공간 시학(詩學)’을 보여준다. 실루엣만 남기면 무덤-젖가슴-반달 같은 이미지일 테다. 이런 미니멀리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하튼 위의 노래에 나오는 ‘언덕’은 걸음을 포기한 체념의 장소나 묵상과 침묵의 자리가 아니다. 숨소리가 들리고 살아 움직이는, 생신(生身)이 더디고 느리게 걷다가 쉬는 곳이다. 잠시, 못 이긴 듯, 흔들흔들 실버들처럼 정주하는 곳이다. 그래서 실버들 늘어진-초가삼간-오막살이면 된다. 많은 소유욕이 필요치 않다. 소유의 거처지가 아니라 존재의 거처지이다. 모든 존재들의 모공이 열려 있는 곳이다. 자발적 비움과 능동적 쉼의 형식만이 있는 곳이다. 자신을 세계에 다 열어놓는, 모두 풀어놓는 곳(쉼터)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수구지심(首丘之心) 또는 구수(丘首)나 호사수구(狐死首丘) 등으로도 표현하는데, 여우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나서 어미젖을 빨고 뛰놀며 자라난, 추억의 굴(窟)이 있는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고향은, 원초적으로는, 나의 ‘살결이 닿고’ ‘푹 안겨봤던’ 그 살가운 추억과 따스한 느낌이 공존하는 엄마의 품이고, 자궁이고, ‘백골이 진토(塵土)되는’ 천지산천=대지이고, 무덤이다.

 『예기』 「단궁·상」에 나오는 이야기 한 대목이다. 위(衛) 나라의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와 거백옥(?伯玉)이 하구(瑕丘)라는 언덕에 올라가 산책하였는데, 공숙문자가 앞서가고 거백옥이 뒤를 따랐다. 공숙문자가 즐거워하면서 말했다. “좋구나! 이 언덕이. 나는 죽으면 이곳에 묻혔으면 하네(樂哉, 斯丘也, 死則我欲葬焉).” 바로 이 대목에서 언덕은 무덤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뒷동산에 묻히고 싶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뒷동산이 자연스레 무덤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언덕=무덤이라는 무의식이 작동한다. 이렇게 언덕은 ‘자궁→젖가슴/배→언덕/초원/오름→굴(窟)/무덤’이라는 어휘들과 인지적 유동성을 가지며 서로 가족관계를 맺는다.
 
나는 신두리 사구를 ’맨발로 이리저리 한참을 돌아다녔다. 맨 발바닥에 스치는 날카로운 풀들의 저항도, 해당화 군락의 꽃잎도, 모두 따스하다. 

민병갈도 이곳 모래언덕에 와서, 그 어딘가 먼먼 바다를 바라보았으리라. 우두커니 서서, 해변의 모래와 그 바람을 견딘 풀들을. 그래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천리포 수목원> 생각뿐이었으리라. 겟국과 버무린 배추에 꽃게, 새우 등을 넣고 시원하게 끓인 게국지처럼 한국인들을 사랑했던 그의 머릿속엔 여전히 소금기 같은 인정에 붙들린, 십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가 주마등처럼 떠올랐지만, 그 가운데 사랑이 머문 곳은 천리포의 수목원이었으리라.

▲ 민병길의 유품
▲ 민병길의 유품

지난밤, 나는 썰물이 진 바다의 속살을 맨발로 느끼고 싶어, 타박타박 해안을 닮은 만리포의 꾸부정한 어둠을 따라, 무작정 고랑 진 모래에 내 살결을 대고 걸어 들었다. 결국 나도 언젠가, 이 땅에, 흔적 없이 썰물처럼 저곳 어딘가로 스며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늘·여기, 이 순간, ‘찰라생찰라멸’을 기뻐하며, 돌아서야만 한다고.


* 이 글은 대구시 달서문화재단의 『문화만개』여름호(vol.07, 2018.7)에 매수 제한으로 축약하여 실었던 것을, 교수신문의 기획 연재에 맞추기 위해 재단 측의 양해를 얻어 다시 보완해 싣는 것임을 밝혀둔다.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 졸업. 일본 츠쿠바(筑波)대학 문학 석·박사. 전공은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 동경대·하버드대·북경대·라이덴대 객원연구원 및 방문학자.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는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언덕의 시학』 외 다수,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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