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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히드라, 누가 퇴치할 것인가?
한국정치의 히드라, 누가 퇴치할 것인가?
  •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0.0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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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헤라클레스는 고대 희랍의 수많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영웅이다. 고대 희랍어에서 영어의 ‘오 마이 가드’에 해당하는 ‘오 제우스’나 ‘오 헤라’와 함께 ‘오 헤라클레스’가 자주 사용된 사실도 그것의 징표이다. 그의 영웅성은 무엇보다 폭력과 무질서의 시대를 종식하고, 당시로서는 현재의 ‘4차 산업’을 의미하는 농업생산의 토대를 확립하여 새로운 국가적 발전을 이룩한 데 있다. 그 폭력과 무질서의 대표적인 상징이 유명한 히드라이며, 그 히드라의 머리를 베어 없애는 행위를 통해 헤라클레스는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킨 주역으로 신화 속에 각인된 것이다.

현재의 한국 정치에도 히드라와 같은 괴물이 있다. 그것을 퇴치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에 한 차원 높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이 히드라는 보기에 전혀 괴물 같지 않고 오히려 상식적이고 당연하고 친근하다는 사실에 그 ‘괴물성’의 핵심이 있다. 국가는 폭넓은 식견이나 깊은 경륜이 없이 교과서적 지식이나 형식화된 이념적 지침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이다. 그것이 대통령을 세계만방에 웃음거리로 만든 국가적 소극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치졸한 패거리 인사 등 온갖 정책적 오류와 시행착오의 ‘괴기한 머리들’이 국가 생활을 어지럽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교과서에 수록된 일반적인 문구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 속에 함축된 세밀하고 구체적인 지식에 대한 섭렵은 물론 그것이 성립하거나 보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탐구되고 설명되어야 하는지 깨닫는 데 있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정의 책임자는 수많은 영역의 전문 지식에 통달할 수도 없고 그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는 국가의 통치가 얼마나 심원하고 복잡하며 고도의 판단력을 요구하는지 그 소업 자체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겸허한 태도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할 경우에만 그는 각계각층의 원로들이나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의 소통을 정치적 선전용의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라 국가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 과정으로 즐길 줄 알면서 최선의 혹은 최적의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적 지향이 없이 일관된 통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진정한 이념인은 특정한 교의에 일방적으로 집착하거나 특정한 행동강령을 무조건 고수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한 교의나 강령의 의미나 진리성 여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탐구할 수 있을 때 한 인간은 진정으로 이념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성찰적 사유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러한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이념적으로 다른 인사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려는 자세는 스스로 신봉하는 이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외면하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속 편한’ 교류에 만족하는 인간은 패거리의 우두머리에는 적합할 수 있어도 국가의 통치자로 적합한 인물은 아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선량하고 도덕적인 행동이 국가 전체 차원에서는 해악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은 인류의 정치사가 현시하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국가의 통치에는 일상적인 도덕성 차원을 넘어 복잡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는 점을 국가통치의 책임자가 깨닫지 못할 때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식적인 정책으로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거나, 대중들의 단편적인 사고나 가변적인 욕구에 편승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무책임한 ‘정감 윤리(Gesinnungsethik)’와 ‘착한 소년 콤플렉스’로 국가는 서서히 쇠락하게 된다.

히드라 신화에서 그 공포의 대상이 티폰(돌풍)과 에키드나(살모사)의 자식이자 케르베로스와 키메라 등 다른 괴물들과 동기간으로 설정된 것은 단순히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다. 무질서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그 당연한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아이러니가 그 신화에 담겨 있다.

한국 정치에서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히드라가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교육조차 제대로 된 지성적 사고훈련을 시키지 못했다는 오랜 교육적 적폐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인들의 범속한 출세주의와 허구적인 이념지향, 역사의식의 빈곤과 위선적인 역사의식, 나약한 권력의지와 그악스러운 권력욕 등은 ‘자르고 잘라도 새로 튀어나오는 머리들’이다. 21세기 한국판 헤라클레스란 바로 한국판 히드라의 그 ‘지겨운 생명력’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 위험에 대해 국민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국가 생활의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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