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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해야 할 기억의 장소 … 억압당했던 생명들이 움트던 공간
응시해야 할 기억의 장소 … 억압당했던 생명들이 움트던 공간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9.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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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5-② 돌산령터널-만대리-시래기덕장-제4땅굴

펀치볼을 개간한 사람들

장구한 시간 동안 일어난 침식·풍화·융기 등의 지질학적 변화가 해안분지의 지형·기후·식생을 계속 바꿨다면, ‘수복지구’ 펀치볼의 거주민과 문화를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38선 이북 양구 지역이었던 ‘펀치볼(Punch Bowl)’ 해안면은 1954년 11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을 통해 인제군에 포함됐다. 그 후 해안분지는 1973년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됐고 1983년에야 해안면으로서 위상을 되찾았다. 해발 1천100m의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에서 인구 증가는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오늘날 해안면은 건강 식재료로 주목 받는 ‘시래기’의 대표 산지가 됐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곳이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꿔지기까지 민북마을 정착민들이 어떤 희생과 고난을 감수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땅의 소유자이던 원주민들이 북으로 가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전쟁의 폐허 위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계기는 피난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재건촌’ 조성이었다. 귀농선 북방 지역의 입주정책은 군부대 작전처럼 실시됐다.

전쟁 직후 해안분지 내부는 탄피와 지뢰가 널려 있는 허허벌판 황무지였다. 1956년 4월, 6사단 군용 트럭에서 내린 160세대의 이주민들은 먹고 살 방도가 없어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미리 ‘사상검증’까지 받고 들어온 그들은 유사시 농기구 대신 총을 들어야 한다는 민북마을 설립 조건에 의해 중장년층으로만 구성됐다. 남북이 서로를 감시하는 첨예한 군사지역인 이곳에서 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럴듯한 ‘대북선전마을’을 가꾸는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살다가 이곳에 처음 들어 온 농민들은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며 군부독재 시절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뢰밭을 개간해 농토로 개척해나갔다. ‘비무장지대’라고 불리지만 실상 ‘중무장지대’인 DMZ를 머리에 이고 있는 중동부전선 민통선 지역에서 다시 마을의 밥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이나 초가집에서 미군이 버리고 간 수저와 반합을 주워 쓰며 버텼지만 땅은 그들의 노력에 응답하지 못할 만큼 척박했고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첫 해에 그들은 여기서 벼를 키워 쌀을 수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주민들은 곡갱이와 삽으로 화전을 일구어 고구마와 감자를 심으며 ‘빤찌볼’로 불리던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했지만 곡물이 원활히 자라기 힘든 곳에서의 자립은 요원해보였다. 개간 과정에서 60여 명이나 폭발물 사고로 인해 죽거나 다쳤는데, 어떤 집에서는 가족 3명이 내리 불구가 되기도 했다.

분단시대 민통선 재건촌의 풍경

1968년 초에 일어난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주민들에 대한 통제는 더 엄격해졌다.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지고 전 국민의 지문 날인을 통한 주민등록 제도가 시작되고 예비군이 창설되던 그 해 이후 요새화된 펀치볼에서의 삶은 병영생활에 가까웠다. 일몰 후엔 철저한 등화관제(燈火管制)와 통행금지가 실시됐고, 밤에 마을로 내려와 순찰을 돌던 군인들은 일출 전까지 민통선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근처 이웃집을 다녀오는 것도 금지했다. 아기를 곧 출산할 것 같은 며느리를 돌보기 위해 불을 피우고 부엌을 드나든 아낙에게 한 겨울 왕복 2km의 비포장도로에서 드럼통을 굴리는 야간 기합을 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산모와 아이를 살리는 것보다 불빛이 새어나가 좌표가 적에게 발각되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절이었다. 여름에는 분명히 민간인인 주민들의 정신무장을 위한 ‘기합’으로 군부대 화장실 청소가 강요됐다. 오물을 퍼날라서 인근 야산에서 키우던 군부대 부식용 농작물에 거름을 주는 작업이었다. 야간에 주민들이 간첩과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군부대의 보안 규정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전쟁 후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에 다시 터를 잡고 사는 그들을 ‘잠재적 빨갱이’나 ‘거동수상자’로 만들었던 그 시대의 가혹한 풍경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인근 북쪽 땅에서도 대남선전마을이 조성되자 이에 대응해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스스로 마을을 방어해야 한다는 대북전략촌의 목적이 더 중요해졌다. 1970년 다시 100가구를 선발하여 입주시킨다는 계획이 실행됐다. 북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문화주택’이나 ‘재건주택’으로 불리던 집을 가구당 한 채씩 제공하고 만대리 일대의 야산을 불도저로 밀어 5천 평씩 땅도 준다는 계획이었지만, 입주식 날까지도 계속 포기하는 가구가 나올 만큼 환경은 열악했다. 개척민들은 薄土에서도 자라는 콩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돌산령터널을 통해 펀치볼로 들어와서 보이는 오른쪽 산기슭에 펼쳐지는 넓은 경사지대가 당시 재건촌 주민들이 일군 ‘대두단지’다. 그런데 몇 해 동안의 노력에도 콩 수확이 형편없자 이주민들은 다시 이곳을 떠나기 위한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1972년 이후 실시된 재건촌 단장 사업도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세련된 유럽풍 전원주택 50채가 급히 지어졌지만,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대북선전용 집은 그들의 생활을 더 윤택하게 만들지 못했다. ‘여기서 하룻밤만 자보고 판단하라’고 구슬리던 군인들은 기습적으로 살던 집들을 철거했다. 매년 4월이 지나도록 겨울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해안분지에서 북향으로 지어진 그 집은 대체 누구를 위한 가시적 전시물이었을까? ‘반공이 국시’이던 엄혹한 분단시대의 애환을 회상하면 2018년에 불현 듯 찾아온 남북의 평화 정세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펀치볼 사람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시린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분단국가의 통제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1997년 정부가 개척 농지를 일괄적으로 국유지로 편입하려고 하자, 평생 인내하며 땅을 일구어 온 주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저항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귀농선 북방지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주인 없는 땅’으로 간주된 해안면의 땅을 재정경제부와 농림부로 귀속시키는 국유화를 진행한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안보정신’을 검증하여 입주시킨 사람들이었지만, 보존자료 미비를 이유로 들며 다시 국가가 그들의 40여년 동안의 경작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농지를 몰수하고 개간비용에 대해서도 보상해주지 않는 재산권 환수 작업이었다. 개척민들은 정부에 임대료를 내고 직접 농사를 지을 때만 경작권을 인정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갑자기 빚을 떠맡게 된 1세대 고령의 주민들은 2001년 이후 개간비 보상을 요구하며 임대계약 거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무를 길러 시래기로 말리는 사람들

펀치볼 한 가운데에 서서 제자리를 360도로 천천히 돌아가며 분지를 응시한다. 새 둥지 안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한 기분도 들고 우람한 산세가 만들어준 보금자리 안에 포근히 잠겨 있는 것도 같다. 이 커다란 둥지를 만든 새가 있다면 하루에 구만리 창공을 날아간다는 『장자』의 大鵬 정도는 되어야 할까. 사방이 막혀 있으니 갇혀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을 줄 법도 한데 인간의 작은 시선에는 분지 내부가 광활해 보인다. 그런데 한 눈에 들어오는 둥그런 펀치볼 둘레길을 걸으며 보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어딘가 모르게 이 땅이 시름시름 앓았던 환자처럼 아파 보이기도 한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양측 군대의 포탄을 받아내던 이 땅은 이젠 무분별한 산비탈 개간으로 인해 숲이 파괴되면서 토양 유실로 경작 활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방을 둘러싼 경사지에서 내려오는 장마철 빗물에 의해 홍수가 빈번해지고 밭의 흙이 깊은 고랑을 내며 해안천을 따라 흘러가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무·배추·감자 등의 고랭지채소가 잘 자라는 펀치볼의 농경지 조건은 최근 들어 더욱 나빠지고 있다. 멀리서도 빽빽이 보이는 구릉지대의 검은 천막은 최근 들어 외지인들이 들어 와 심은 인삼밭인데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바람을 타고 온 겨울 안개가 농약을 엄청 많이 쓴다는 인삼밭 시야를 가릴 때쯤, 땅에 점점이 박힌 하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 보니,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밑동만 남긴 채 잘려져 땅에 박혀 있는 시래기용 그 옆으론 집집마다 있는 시래기 덕장들이 보이고 정성스레 무청을 널어 말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그 풍경 사이로 드문드문 박힌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산을 타고 내리쳐오는 차가운 바람을 의연히 맞고 있다. 

어느 샌가 해안면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되어 버린 ‘펀치볼시래기’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무가 좋아야 한단다. 땅에서 길어 올리고 햇빛에서 얻은 양분을 무 몸통이 아니라 땅 위의 이파리에 집중시키도록 개량된 무는 뿌리 부분이 작달막하다. 줄기를 자르면 물이 확 배어나는 무청은 도열한 줄에 매달려 60여 일 동안 마른다. 황태처럼 얼었다가 가끔 드는 햇살에 슬금슬금 녹으며 다시 풀어지는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시퍼런 무청은 누릇누릇한 시래기가 된다.

무청을 싹둑 잘라서 잘 널어 말리는 사람의 수고로움이 더해지면 그 다음으론 앙칼지게 차가운 겨울바람과 변덕스러운 일교차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의 겨울은 반나절 잠깐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한증막처럼 소들이 하얀 입김을 가득 내뿜는 냉기가 교차된다. 이런 큰 일교차가 시래기를 맛있게 말리기에 최적의 기후가 되는 것이다. 10월부터 말려 12월부터 수확하는 시래기는 이곳의 혹독한 추위와 사람의 정성이 깃든 합작품이다. 한 해가 넘어가기 열흘 전부터 제대로 먹을 수 있다는 햇시래기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다. 유난히 추워야 더 맛있는 시래기는 조금만 삶아도 먹기 좋은 부들부들한 섬유질을 갖는다. ‘겨울농사’가 된 시래기는 이주민들이 월동 먹거리를 만들던 생존노동의 산물이었지만, 이젠 또 다른 이주자인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 됐다.

시래기는 완전히 건조된 후에야 다시 물을 흠뻑 빨아들일 수 있고, 무청이 잘린 무는 다시 밭에서 썩어 거름이 된다. 어머니 대자연이 그러하듯 자신을 소멸시켜 ‘나’의 다른 얼굴인 ‘너’를 살려내고 서로의 몸은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 펀치볼의 척박한 환경과 분단국가가 강제했던 가혹한 조건에서 살아 온 1세대 개척민들은 그 먹거리의 換骨奪胎를 지켜보며 ‘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무청이 삭풍을 이겨내고 시래기가 되는 것처럼 해안분지는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분단의 최전선에 자리 잡은 펀치볼로 불리게 됐고,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자식을 낳고 기르며 생명의 땅을 일구었다.

‘안보견학지’로 볼 수 있는 펀치볼의 모습은 해안분지의 긴 역사를 담은 벽화의 일부일 뿐이지 아닐까. 기념관에서 전쟁과 분단을 ‘추억’하는 각종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시대에 뒤떨어진 안보영상물을 관람하고 다시 몸을 접어 조잡한 모노레일을 타고 축축하고 어두운 제4땅굴을 돌아보고 나오는 뒷맛은 좀 헛헛하다. 접경지역 양구와 ‘최전방 요새’ 펀치볼의 모습은 훨씬 더 다채롭다. 이제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새로운 ‘평화의 질서’로 재구축되어가면서, 우리가 다시 응시해야 할 기억의 장소는 바로 분단 과정 속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살던 그곳, 억압당했던 생명들이 움트던 공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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