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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여자와 한국 남자
파리 여자와 한국 남자
  • 김종영 편집기획위원/경희대·사회학    
  • 승인 2018.09.0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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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종영 편집기획위원/경희대·사회학    

한국 여자를 이해 못하는데 파리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장미란의 『파리의 여자들』을 집어 들고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이 책을 통해 ‘된장녀’와 ‘한남’으로 대표되는 젠더 간 혐오의 기호들이 난무하는 미투시대를 헤쳐 나갈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가까우면 잘 보지 못하는 법. 파리 여자는 거리가 있는 주체이자 문화이며 젠더이다. 한국 여자와 파리 여자는 어떻게 다를까? 모든 종류의 감수성이 발달한 파리 여자를 이해하면 젠더 감수성을 폭발적 정치력으로 전환시킨 한국 여자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파리 여자는 환상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소위 한남(한국남자의 준말)스럽지 않은 프랑스 남자를 만나고 세련된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이 보장된 사회생활과 복지생활을 누리며 긴 바캉스로 삶을 음미하는 주체가 아니던가. ‘한남’의 반대말이 되어 버린 ‘유남’(유럽남자의 준말)들은 이들과 어떻게 살아갈까? TV 프로그램마다 한국 여자랑 결혼한 프랑스 남자, 독일 남자, 핀란드 남자, 스웨덴 남자, 곧 ‘유남’들이 등장하여 ‘한남’이라는 전형적 기호를 만들어내고 융단 폭격을 하지 않았던가. ‘한남’은 가라. 우리는 독립적이고 세련되며 감수성 있는 ‘유남’을 원한다! 

책을 펼치자마자 저자와 책의 수준에 경탄한다. 깊이, 박학다식, 분석력, 그리고 따뜻한 감성이 아름답게 결합된 문장들. 페미니즘, 심리학, 문학을 대담하게 결합시킨 탁월한 실험정신. 무엇보다 파리지엔느의 내면의 심연을 끌어올리는 상상력과 감수성. 실증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과학계의 연구자들에게 이런 글쓰기를 권한다. 글쓰기는 재현이 아니라 탐구의 방법이자 인식론이며 정치라는 사실을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그토록 배워 왔건만 한국의 사회과학계에서 그런 글쓰기를 얼마나 찾아보기 힘든가. 

까칠한 이민자 출신의 파리 아파트 관리인 라시다. 프로방스 성에서 품위와 계급을 지키며 살아가는 남작부인 테레즈. 파리 부촌 16구의 중학교 스페인어 선생님 마농. 탁월한 영재로 자랐지만 번역가로 인생의 진로를 바꾼 후 불행해져 정신병원에 갇힌 클레르. 파리에서 만난 소련 출신의 남자를 사랑하여 동서를 오가며 행복과 불행을 겪고 난 후 죽음을 기다리는 제르멘. 이 다섯 여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가족, 사랑,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길을 헤쳐 나간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이들의 내면은 불타오르고 이들 인생의 오디세이는 우연과 또 다른 우연 사이로 연결되며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가족으로부터 위안 받고, 사랑으로 불타고, 자신들의 일로부터 성취감을 느낀다. 동시에 이들은 가족 때문에 무너지고, 사랑 때문에 무너지고, 일 때문에 무너진다. 

여자의 삶의 다양성. 그건 파리 여자이건 한국 여자이건 마찬가지다. 계급, 젠더, 인종이 각기 다른 파리 여자들은 나름대로 이 복잡한 사회적 관계의 망들을 헤쳐 나가고 자신이 꿈꾸는 사랑, 야망, 가족을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68혁명이 안겨준 자유분방함 속에서 파리 여성들은 관습을 넘어서 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장미란이 말하듯이 그들은 “열정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니 자연 상처도 많은” 여자들이다.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삶이기에 삶은 더욱 피곤하고 불행해진다. 따라서 프랑스는 세계에서 항우울제를 가장 많이 복용하는 나라이고 여성들이 더 많이 복용한다.          

파리 남자들은 어떨까? 의외로 한국 남자와 비슷하다. 이들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이며 열정적이며 때로는 권위적이어서 파리 여자들을 괴롭힌다. 물론 파리 여자들도 이들을 가끔 괴롭히지만. 하지만 프랑스는 어느 나라보다 자유분방하고 연애 이야기가 넘쳐나며 남녀간의 유혹이 자연스러운 남녀혼성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가 아무리 개방됐다 해도 우리의 유교적 무의식은 이런 혼성문화에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파리 남자로 산다는 것은 부러운 것이기도 하고 부담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도 사랑에 무너지고 가족에 무너지고 일에 무너진다. 상처 없는 열정적인 삶은 불가능하기에.

안희정 전 지사의 무죄 소식과 혜화역 시위 소식이 연일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지금 한국 여성들의 내면을 좀 더 차분하고 깊이 있게 볼 기회는 없을까. 한국 남자/한국 여자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파리 여자-한국 여자의 병렬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좀 더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데이트 폭력으로 무너지고 몰래카메라로 무너지고 직장에서의 차별로 무너지는 한국 여자들이 파리 여자들보다 불행한 것은 아마도 무너지는 이유가 달라서가 아닐까. 파리 여자들처럼 차라리 사랑으로 무너지는 게 낫지 않을까.            
    

 

김종영 편집기획위원/경희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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