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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통치’ 아닌 ‘차선의 국가’ 실현하고자 한 力作
‘철인통치’ 아닌 ‘차선의 국가’ 실현하고자 한 力作
  • 이기백 성균관대 초빙교수
  • 승인 2018.08.27 10: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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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 『법률 1,2』(플라톤 지음, 김남두, 강철웅, 김인곤, 김주일, 이기백, 이창우 옮김, 나남출판)

이 작품은 공동연구와 공동번역의 산물이다. 1999년 원문독회를 시작한 이래 당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번역팀을 이끌고 이정호 정암학당 이사장이 여러모로 뒷받침해줘 5년여 시간을 거쳐 1차 완독을 했고,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결실을 보게 되었다. 『법률』(Nomoi)은 플라톤이 말년에 저술한 마지막 대화편으로서, 그의 원숙한 사상들을 보여주는 역작이며 그의 대화편들 중 가장 방대하고 그 내용도 풍부하다. 윤리학, 영혼론, 형이상학, 정치철학뿐 아니라 법학, 정치학, 종교학, 교육학, 예술 분야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법률』은 1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3권에서는 무엇을 입법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플라톤은 덕 전체가 입법의 목표로 돼야 한다고 볼뿐더러, 특히 지성(혹은 분별)과 자유 및 우애를 그 목표로 제시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아래 이후의 논의에서는 『국가』에서처럼 말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나간다. 그런데 4권과 5권에서는 입법이 강제적 법률 조항들만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고, 그 법률들 앞에 권고와 설득의 내용을 담은 전문(prooimia)이 추가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6권 이후에는 마침내 법률의 제정이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이를테면 여러 관직의 설치와 관료의 선출 방법이나 업무에 대한 규정, 시민들의 결혼과 출산과 육아와 시가교육이나 체력 단련 등에 관한 규정, 그리고 범죄와 형벌에 관한 규정 등이 제시된다. 그리고 12권에서는 사실상 철학자들로 이루어지는 야간회의의 설치에 관한 논의가 전개된다. 『법률』에서 세세한 법제정을 보여주는 대목들에서는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데, 중요하면서도 비교적 흥미로운 논의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플라톤 최후의 작품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에서는 통상 『국가』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곤 한다. 그러나 『법률』은 플라톤의 최후의 작품으로서, 『국가』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어떤 면에서는 『국가』보다 더 깊은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작이다. 그리고 『법률』은 『국가』와 다른 논조를 담고 있어 이 두 대화편을 함께 조망해 볼 때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한 나라를 그려보고, 이런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의 실현을 위해 세 가지 방안을 강구한다. 그 하나는 나라를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수호자들 사이에 재산과 처자의 공유를 통해 ‘하나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나라의 실현을 위해 플라톤이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가장 지혜로운 자인 철학자가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법률』에서 그는 지혜를 가진 통치자(철학자)라 하더라도 절대 권력을 가질 경우 언제까지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익을 멀리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혹 신적인 섭리에 의해 지혜롭고 언제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통치자가 출현해 통치를 한다면 최선일 테지만, 그런 통치자는 현실적으로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지혜에 의한 통치 대신 법에 의한 통치를 ‘차선책’으로 택한다.

그런데 플라톤이 『법률』에서 철인 통치 대신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우는 쪽으로 정치철학적 입장을 바꾼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큰 논란거리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나라에 적어도 지성이나 분별이 실현돼야 한다는 원칙이나 이념만큼은 변함없이 유지하고자 한다. 다만 그는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해서 그 원칙을 사람이 아니라 법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이 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가 입법의 목표 중 하나로 지성의 실현을 내세우고, 또한 법에 의해 안정되게 지성을 실현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할 기구로 야간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성을 법률에 반영하여 나라에 지성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플라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인치라는 측면과 지성의 실현
그러니까 그는 철인 통치 사상에 함축되어 있는 두 측면, 즉 ‘인치’란 측면과 ‘지성의 실현’이란 측면과 관련해서, 『법률』에서는 후자는 유지시키되, 전자는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치에 의해 사익을 추구하고 권력을 남용할 여지를 현실적으로 크게 염려해서, 통치자를 비롯한 나라의 관리들과 관련해 “법이 관리들의 주인이고 관리들은 법의 노예인 나라”를 지향한다. 곧 그는 ‘인치’에 의해 지성을 실현하기보다는 ‘법치’에 의해 지성을 실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플라톤이 좋은 나라를 실현하는 데 ‘차선책’으로 『법률』에서 인치보다 법치를 역설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할 때 강제보다는 전문을 이용해 최대한 시민들을 설득하고 권고해야 한다고 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법치는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상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인치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통치자들이 생기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법치론은 오늘날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시민들을 최대한 설득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역설도 통치자가 어떻게 시민들과 소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해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을 만하다.

그리고 그는 『국가』에서처럼 재산을 공유하고 심지어 처자까지 공유하여 사적 소유를 없앰으로써 하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최선책’으로 보지만, 이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 ‘차선책’을 택한다. 즉 그는 『법률』에서 처자의 공유를 내세우지 않고, 또한 재산도 공유보다는 사유제를 받아들인다. 다만 부자의 재산이 가난한 자의 재산보다 4배를 넘어선 안 되고, 못가진자의 기본 자산은 양도될 수 없도록 법률로 제정한다. 4배라는 기준은 문제가 있을지라도 오늘날 우리가 심각하게 우려하는 양극화와 같은 현상과 가난한 자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는 일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양극화가 입법의 목표 중 하나인 우애를 해친다고 본다. 

더 나아가 『국가』에서 지혜로운 철학자가 통치하는 정체가 최선의 것이라고 보고 민주정체를 배척했지만, 『법률』에서는 그 일부를 받아들인다. 그는 입법의 목표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민주정체와 일인정체 사이에 適度나 중용을 유지하는 정체, 즉 혼합정체가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들을 완전한 예속 상태로 이끄는 일인 전제정체도, 완전한 자유로 몰아간 아테네의 민주정체도 그런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생각한 혼합정체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고려한 것이다. 훗날의 ‘권력의 분립과 균형’에 관한 이론의 싹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률』은 철인 통치의 이상국가 대신에, 시민들 간에 우애가 상하지 않을 만큼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고 인치 대신에 법치를 택하며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혼합정체를 제시함으로써 ‘차선의 국가’를 실현하고자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기백 성균관대 초빙교수
성균관대에서 서양고대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저서로는 『아주 오래된 질문들: 고전철학의 새로운 발견』(공저)이 있고, 역서로는 플라톤의 『필레보스』가 있다. 현재 정암학당 이사 및 서양고전학회 편집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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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철학자가되자 2018-08-28 19:00:27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