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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계약의 고통스럽고도 매혹적인 여정
카이로스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계약의 고통스럽고도 매혹적인 여정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 승인 2018.08.27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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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근대 과학의 여러 분야’_ 「사회조직의 근거: 공동체-사회계약-법률 체제」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사진 출처=네이버 강연 캡쳐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사진 출처=네이버 강연 캡쳐

몇 달 전 강연 부탁과 함께 논제를 부여받고, 막막한 수험생의 입장에서 답안을 작성하는 동안, 한 학자의 이름이 계속 떠올랐다. 20세기의 후반부를 오로지 하나의 입론을 증명하기 위한 기나긴 논증으로 보냈던 이 학자의 이름은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이다. 잘 아시듯이 지라르는 문학 비평과 신화 해석, 인류학적 탐구와 성서 재해석을 통하여 인간 사회의 모든 문명이 희생양 제의라는 공통의 기제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해왔다. 초석적 폭력이 희생양 제의를 통해 성스러움으로 변모하고 인간의 문명이 질서를 재생산하는 과정에 대한 지라르의 분석에는 폐부를 찌르는 통찰력이 있다.

폐부를 찌르는 지라르의 통찰력

물론 지라르가 인간의 문명이 희생양 제의에 갇혀 있음을 고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희생양 제의의 본질이 이미 폭로됐으며, 그렇게 해서 가능하게 된 앎, 즉 앞서 말한 메타적 앎을 통하여 희생양 제의를 대체할 사법 제도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라르가 제시하는 이와 같은 처방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희생양 제의의 본질이 폭로되기 이전과 이후 가운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지라르의 기나긴 논증 과정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어떻게든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는 재건 과정과 겹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뉘른베르크와 샌프란시스코와 제네바와 뉴욕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인권선언, 국제연합헌장과 아우슈비츠 박물관과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들어낸 이 일련의 과정을 지라르는 도대체 어떤 시대를 전제로 보고 있는 것일까? 더 직접적으로 질문을 가공해본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된다. 20세기 후반의 인류 문명은 여전히 희생양 제의의 본질이 폭로되기 이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 결정적인 폭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모더니티에 기초한 사회계약을 역대기적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을 전제로 설명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정확한 설명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개입해 들어오는 초월의 관점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카이로스의 시각이다. 카이로스의 시각에 의하면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은 결코 과거에 한 번 주어진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 개입해 들어와 우리를 고통과 매혹 속에 부대끼게 만들고야 마는 현재 시점의 명령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앞에서 제가 던진 질문, 즉 우리가 희생양 제의의 본질이 폭로되기 이전과 이후 중 어느 시점에 있는가의 질문은 결코 르네 지라르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질문을 던지는 우리 각자이기 때문이다.

중층 근대성 이론이 주목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성숙한 문명들은 모두 비판성과 윤리성 사이의 긴장을 포착하고 제도화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명들의 예를 고전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해봤지만,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은 고전적 헌정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그 명령이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뜻에서 모더니티에는 불가역적인 측면이 내포되어 있다. 모더니티에 기초한 사회계약은, 비록 여전히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 제의를 다양한 형태로 반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희생양 제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복음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모더니티는 근원적인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서 모더니티에 기초한 사회계약은 전전반측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혁명적인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

다시 말하건대,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은 혁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쉬운’ 발상을 사회이론의 장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유의 이념과 민주의 이념에 근거해야만 하는 지독히도 ‘어려운’ 발상만을 사회계약의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으로 남겨놓는다. 지난 세기말 영미의 정치철학에서 존 롤즈(John Rawls)의 『사회정의론』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이 요구했던 점들에서 나타나듯이, 이 지독히도 ‘어려운’ 발상을 사회적 삶의 구체적인 맥락에 안착시킬 필요성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결단은 회피될 수 없다.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이유와 논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마지막으로 보편적/정언적 자유의 명령에 대해 우리 모두가 어떻게 답할 것인지를 생각해볼 것을 청하고 싶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 명령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시각으로 이해할 경우에 훨씬 더 깊숙이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온다. 모더니티에 기초한 사회계약의 고통스럽고도 매혹적인 여정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고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이 명령은 지금도 우리 각자에게 묻고 있다. 만약 이 여정을 계속하기로 작정한다면, 우리 각자는 홉스와 칸트와 그랜드 내러티브의 저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헌법과 법률의 이중 규범 체제를 집단 지성을 통해 고안했던 공법 법률가들 모두를 능히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메타적 앎의 새로운 차원을 획득해야만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150여
년 전에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게티즈버그 언덕에서 말했던 것, 즉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아마도 그 희망 하나뿐일 것이다.
 

이국운 한동대·법학부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대표 논문으로 「한국 사회에서 법조계 전관예우의 원인과 대책」, 저서로 『법률가의 탄생』, 역서로 『역동적 자유: 민주주의 헌법의 해석 방법』 등이 있으며, 한국입법학회, 법과사회이론연구회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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