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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에 관한 사색 
‘깃털’에 관한 사색 
  •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8.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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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국문학

퇴직은 말 그대로 현재의 직업이나 맡은 일에서 물러난다는 것인데 나는 지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하면서 활개 치고 돌아다니니 그 분방한 자유의 기쁨을 일러 무삼하리오. 아직은 퇴직 후 불과 3년이라 초년병 수준이언만 회고의 눈길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보노라니 분주히 뛰어다니던 내 자신의 모습이 희뿌연 실루엣 속에 보이는 듯해서 새삼 끓어오르는 감개가 한량없다. 

도합 41년 세월의 교단생활이었다. 국문학전공으로 근현대문학사 연구는 나에게 딱 맞는 방향이었다. 특히 분단시대 혼란을 겪어온 민족사를 거슬러 그 시절 빛바랜 자료를 모으고, 각종 도서와 간행물을 읽으며 영감을 떠올리는 일은 마냥 행복하였다. 그 시간은 내가 직접 대면하지 못한 先學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茶山 정약용(1762~1836), 順菴 안정복(1712∼1791), 白巖 박은식(1859~1925), 丹齋 신채호(1880∼1936), 心山 김창숙(1879∼1962) 등 개결한 지식인들의 글과 영혼을 음미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감격이었다. 여러 추억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라 할 만한 것은 분단시대 매몰 시인 중 한 분인 白石(1912~1996) 시인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학창시절 분단 때문에 빚어진 여러 제약으로 제외된 문학인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호기심은 기어이 禁斷의 자료들을 수집하는 시간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87년, 백석 시인의 아담한 전집 발간으로 귀결되었다. 이 책이 발간되자 우리 문학사가 잃어버린 귀한 시인을 다시 되찾았다며 언론에서는 갈채와 찬탄을 보내주었다. 

이를 기점으로 백석의 시문학을 연구하는 무수한 학위논문과 비평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뒤늦게 복원된 백석 시인은 한국 문학사의 여러 인물들 중 가장 많은 연구대상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백석 시인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문학상도 제정되고, 연극, 뮤지컬,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여러 문화 장르로 놀라운 확장이 펼쳐졌다. 백석의 시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 지문으로 출제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젠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한국 최고의 인기 시인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 白石學의 물꼬를 틔우고 첫 삽질을 내가 최초로 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흐뭇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이후로도 권환(1903~1954), 조명암(1913~1993), 이찬(1910~1974), 조벽암(1908~1985), 박세영(1902~1989) 등 매몰 시인들의 전집을 줄기차게 발간한 바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SP라고도 부르는 옛 유성기음반 수집과 연구에 눈길을 돌린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러한 활동은 다수의 논문과 저서발간으로 이어졌다.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스스로 가만히 헤아려보면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방치되고 홀대받던 분야에 주목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거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을 나는 혼자서 열심히 해왔던 것이다. 내 활동에 대해 누가 어떤 평가를 하든 말든 나는 묵묵히 내가 좋아하는 관심 분야에 골몰해왔다. 

1991년에 발표한 나의 시작품 가운데 ‘쇠기러기의 깃털’이란 작품이 있다. ‘쇠기러기 한 마리/ 잠시 앉았다 떠난 자리에 가보니/ 깃털 하나 떨어져 있다// 보숭보숭한 깃털을 주워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이런 깃털조차 하나 없을 것이다// 하기야 깃털 따위를 남겨놓은들/ 어느 누가 나의 깃털을 눈여겨보기나 하리’가 그 전문이다. 이 시에서 ‘깃털’이 지니는 의미를 가만히 음미해본다. 무엇인가 남겨놓은들 모두 덧없는 깃털 하나에 불과한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오늘까지 무탈하게 살아온 내 자신의 시간과 경로를 스스로 축복할 뿐.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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