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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한 만큼 보이는 문학, 60세 지나니 비로소 눈이 뜨였다”
“경험한 만큼 보이는 문학, 60세 지나니 비로소 눈이 뜨였다”
  • 이해나
  • 승인 2018.08.2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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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60부터] ①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80세, 90세가 돼도 연구를 계속하는 외국의 학자와 비교해 한국 학자들이 早老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과)의 한마디에서 ‘연구는 60부터’는 출발했다. 耳順이라 불리는 60세를 전후해 교수들은 퇴임을 맞는다. 그러나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되는’ 연륜의 절정기를 활용해 퇴임 이후 더 활발히 연구 활동에 매진하는 교수들도 있다. 이들을 만나보는 새 연재기획 ‘연구는 60부터’는 원로교수의 연구 활동을 격려하고 후학을 자극하기 위해 마련됐다. 부정기적으로 〈교수신문〉 독자들을 찾아올 코너의 첫 타자는 물론 김욱동 교수다.

울산=이해나 기자 rhna@kyosu.net
울산=이해나 기자 rhna@kyosu.net

하와이안 셔츠에 하얀색 스니커즈. 70세 교수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스타일리시한 복장이다. 인터뷰 일정 조율을 위해 주고받는 메일을 아이패드로 보낼 때부터 심상찮다 싶었다. 무더위를 뚫고 울산행 기차에 올라 찾아간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는 말갛고 해사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2013년 정년퇴임 후 5년간 김 교수는 단행본 11권, 번역서 5권, 국제학술지(A&HCI) 논문 13편을 집필했다. 퇴임할 때까지 A&HCI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하는 교수들도 많은 현실에서 실로 놀라운 성과다. 주제 역시 그의 전문 분야인 포크너, 헤밍웨이 등 영문학부터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 강용흘(1898~1972)과 이근삼(1929~2003)의 희곡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단순히 연구 열정만으로 김 교수의 多作을 설명하긴 어렵다. 그가 꼽는 비결은 ‘훈련’이다. 수십 년째 밤 9~10시면 잠들어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아침 7시면 연구실로 출근하는 일과를 반복해 왔다. 매일 한 시간 정도는 걸으며 건강을 관리한다. 김 교수는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며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훈련의 결과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저자명 김욱동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책만 총 190여권, 현재까지 단행본 누적 판매부수는 100만권이 넘는다.

퇴임 후 학생 지도와 행정 업무 부담이 줄어들고, 60세를 넘기면서 그간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책이 술술 읽히는’ 체험을 하게 된 것도 다작의 비결이다. “공자는 60세를 ‘이순’이라 말했지만 저는 ‘目順’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음악이나 바둑에는 신동이 있지만 문학에는 신동이 없어요. 문학에는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문학이야말로 60세를 넘겨서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나는 ‘유목민 학자’

대중에게 김 교수는 F. 스콧 피츠제럴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영미문학 번역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번역가와 교수 이외에도 문학연구가, 문학비평가 같은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영문학자’라고 칭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국제화 시대에 좁은 분야만 파고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영문학부터 수사학, 번역학, 환경문학, 문학생태학, 민속학, 소수민족 문학 등을 다루면서 교양적인 단행본은 우리말로, 학술적인 논문은 영어로 집필하는 원칙을 지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자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탐구하는 그를 두고 ‘화전민 학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김 교수는 그러나 화전민 학자, 들뢰즈식으로 표현하면 유목민 학자를 자처한다. 여러 분야를 통섭적·융합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학자도 한국 학계에 필요하다는 주관 때문이다. 그의 이런 노력은 지난 5월 출간된 『문학이 미래다』(소명출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에서는 텍스트 비평이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 문학·시·광고 등으로 뻗어 나가는 김 교수의 학문적 생명력을 만끽할 수 있다.

말보다 행동으로 귀감되고파

김 교수는 서강대에서 정년을 맞은 후 현재 UNIST 기초과정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UNIST 신입생이라면 모두 기초과정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데, 대학 측은 명교수들을 기초과정부로 초빙해 학생의 교양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교수에게도 물론 최고의 연구 환경을 제공한다. 미시시피대에서 석사 학위,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듀크대, 노스캐롤라이나대 등 내로라하는 명문대에서 교환교수 경험이 있는 김 교수에게도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즉각 마련해 주는 UNIST”는 퍽 만족스럽다. 최근 그는 한 번 더 연구 영역을 확장해 『그리스인 조르바』를 형식주의·페미니즘·상호텍스트성·실존주의·생태주의 등 다섯 가지 비평 방법을 동원해 해부했다. 이 연구 결과는 영국에서 영어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인문학 분야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연구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손에서 책을 놓지 마라’는 말보다 직접 왕성하게 연구하는 모습으로 본보기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다. 60세가 지나고서야 의무감에서 벗어나 즐기며 연구하고 생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김 교수는 공자의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를 동료·후배 교수에게 전하고픈 말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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