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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시대를 앞서가는 자여
화 있을진저, 시대를 앞서가는 자여
  • 조은영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8.13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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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화 있을진저, 자기 시대보다 앞서 보고 행하는 자들이여,’ 세상이 그렇지요?”

인터뷰 중에 케니 샤프(Kenny Scharf)에게 내가 나직이 말했다. ‘1980년대 뉴욕 미술계의 스타, 미국 팝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그는 같이 활동하던 선배 앤디 워홀, 절친했던 장 미셀 바스키아, 룸메이트 키스 해링을 1980년대에 모두 질병과 마약으로 잃고 홀로 남은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다.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어조가 잠시 격앙됐다. 1980년대 후반 유학 초기에 학과 친구들과 나눈 추억, 가령 ‘팩토리’ 파티에서 워홀이 자기 여자 친구가 입은 흰색 새 미니드레스에 ‘Warhol’ 사인을 했기에 옷장에 고이 모셔뒀다는 급우의 일화, 이스트 빌리지 ‘반항아’들인 바스키아와 샤프와 해링에 대한 토론을 회상하던 내게 샤프는 오히려 인고의 시간을 토로했다. 아시아 최초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한 국내 미술관의 도록 서문을 쓰기 위해,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작가 작업실을 방문 중이었다. 바쁜 그의 일정에 갑자기 끼어든 터라 짧게 예상했던 인터뷰는 세 시간째 이어졌다. 그가 직접 만든 아몬드 우유를 넣어 내린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1, 2년만 앞서가도 장애가 산 같은데 10여년을 앞선 삶이 오죽 힘들었을까 수긍됐다.

미술사 전공자로서 돌아보면 그때 20대 초반인 그들은 자기 시대를 마치 거울로 비추듯 미술에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제도권 중 비교적 변혁이 자유롭다는 예술계에서도 이는 인생을 내건 모험이었다. 엘리트 취향을 만족시켰던 모더니즘과 ‘고급미술’에 저항하고 팝아트를 극한까지 실험하면서, 1980년경부터 대중 취향과 상업문화는 물론이요, 애니메이션, 낙서, 힙합, 펑크, 클럽문화, 거리미술까지 도입한 그들은 종래에 미술이 아니던 것을 미술로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씨름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코믹한 애니메이션 콘텐츠에 생태파괴, 핵, 인류 종말 등 진지한 화두를 접목한 케니 샤프는 전화기, 텔레비전, 패션부터 캐딜락과 비행기까지 작품화하면서 고급과 저급문화의 장벽(대학교육이 쌓기에 한몫했던)을 허물어갔다. 그의 일행에게는 저급미술가, 길거리작가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요절한 동료들은 이내 추앙됐고, 산 자는 각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이후 차세대 작가들은 유사한 작업으로 글로벌 미술계의 아이돌로 승격한 터이다. 시대보다 너무 앞서간 대가가 아닐까. “그것이 (전쟁터에서 총알받이 같은) 전위부대인 아방가르드 작가의 숙명 아닌가요?” 덧붙이는 내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벗들이 떠난 후 샤프는 아마존에서 지내다가 생태파괴에 분노한다. 지구의 호흡기와 같은 아마존 정글보존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무관심에 그는 마돈나를 비롯한 연예계 스타들을 대동했다. 샤프와 배우들이 앞장선 생태 보호에 대한 당시 기사에서 그는 톰 크루즈보다 맨 앞에 실린 사진에 “인기 높은 젊은 화가라기보다 배우 같은” 작가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원시가족과 SF 우주가족 연작보다 나무들이 살아있는 얼굴을 지닌 정글 연작이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와닿았다.

현재진행형 미술을 역사로 쓰는 사람으로서 시대보다 앞선 그의 행보, 벗들을 잃은 상실감에도 제도권과 씨름하면서 생명존중 운동에 앞장서고 작품화한 용기가 고마웠다. 반 고흐는 생전에 재료비 원가에라도 작품판매를 소망했음에도,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 피카소는 추위에 손이 곱는 빈곤에 완성작을 불쏘시개 삼으며 새 작업에 매진한 시절이 있었다. 현재 수천억원을 호가하며 애호되는 그들 작품은 동시대 인물들의 보수성과 편협성을 상기시키지만, 지금도 시대를 앞서가면 ‘화’를 무릅써야 한다. 나오는 길에 그는 인사동 거리에서 몇천원에 산 내 흰색 반달형 부채에 드로잉을 해줬다. 벽에 걸어 모셔둘 생각을 하는데, ‘일용품이니 꼭 사용하라’고 당부했다.

 

조은영 편집기획위원/원광대·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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