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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교수의 명예
명예교수의 명예
  • 한석종 경북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8.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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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한석종 경북대 명예교수·독어독문학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회자되던 ‘백세 시대’의 트렌드가 보편화되고 우려했던 ‘고령 사회’가 현실화되면서 노인들의 삶의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고령 사회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명예교수들의 역할과 패턴도 백세 시대에 맞추어서 달라져야 한다. 그들은 ‘새 노인’ 클럽에 가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회에 역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동력이 되는 자원은 얼마나 될까?

통계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도 매년 1천명 이상이 명예교수로 추대될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센터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 4년제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의 총수가 6만8천명 정도인데, 매년 이 인원의 1.5% 이상이 정년퇴직 후 명예교수로 추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는 해가 갈수록 명예교수의 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1982년 도입됐던 소위 ‘졸업정원제’의 영향으로 신임교원의 채용이 급증했는데, 이때 채용된 교수들이 지금 한창 퇴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명예교수가 된 사람들은 수십 년간 각자의 해당 전공 분야를 연구하고 교육해 온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쌓은 전문지식과 경험은 퇴직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건강 역시 아직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년’ 정도의 신체 연령을 유지하고 있는 분들도 많다. 게다가 지금은 백세 시대이다. 적어도 퇴임 후 십여 년 이상은 지적·육체적 활기가 많이 감소하지 않는다. 따라서 책 집필에 몰두하는 분들도 있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사회를 위한 각종 봉사활동에 애쓰는 분들도 의외로 많다. 하지만 이런 봉사활동 중에서 명예교수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축적한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몇 걸림돌이 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명예교수 개인 차원에서 이런 교육과 관련된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종의 조직이 필요한데, 필자가 몸담았던 경북대에서는 명예교수회가 직접 나서서 이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1년 결성된 경북대 명예교수회는 그동안 여러 회원이 다양한 영역에서 자발적인 활동을 펼쳐 왔지만, 2017년 지역의 중·고등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진로강연회를 기획하면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외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명예교수회에서 무료강연 지원자들의 인적 사항과 강연 소제목을 교육청을 경유해 일선 학교에 전달하자, 학생들의 의견을 수합한 일선 학교의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지금까지 지역의 50개 학교가 경북대 명예교수회에 강연을 요청했고, 총 116명의 명예교수가 3천968명의 수강자들에게 강의를 했다. 

지난달 4일 대구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개최됐던 진로 선택 강연회를 예로 들어 보자. 이날 이 학교는 15명의 명예교수를 강사로 초청했다. 같은 시간대에 15개의 강의실에서 전공이 서로 다른 15명의 명예교수가 강사로 나서서 진로 선택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고, 강연 후에는 진로 선택을 위한 토의와 상담, 설문지 작성이 1시간 이상 이어졌다.

경북대 명예교수회가 추진하는 강연회를 통해 붕괴된 공교육 현장이 복구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명예교수가 일선의 학교 선생님들을 대신해 획기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명예교수회가 추구하는 바는 소박하다. 학교의 정규수업과 담임선생님의 열성적인 지도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사회의 선배로서 하나의 나침반이 되려는 것이다. 어떤 명예교수의 강연도 뜨거운 8월의 태양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길가에 묵묵히 도열한 가로수가 보도 위에 잠시 작은 그늘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강연이 타는 목마름 속에서 허덕이는 학생들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한석종 경북대 명예교수·독어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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