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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함께2’로 보는 현대의 신화
‘신과함께2’로 보는 현대의 신화
  • 문광호 기자
  • 승인 2018.08.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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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함께2」의 포스터

“경제라는 거, 그렇게 필요한 거야? 요즘은 모두가 경제로 난리야! 하지만 정직과 위엄 있는 생활과 경제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에 등장하는 세 신은 무력하다. 그들은 경제에 대해 무지하며 오래된 율법에 어울리는 ‘善人’을 찾는 데만 혈안이다. 철저히 방관자이길 바라는 신들은 그들이 선인으로 지목한 ‘센테’의 고통에 잔인하리만큼 냉정하다. 이쯤 되면 신이라는 이름은 허울뿐이다. 차라리 신의 강림을 ‘로또에 맞았다’고 여기는 것이 센테에게는 위로다.

“펀드는 기다림이야. 두고 봐. 반드시 오를 거니까.”

사천의 신들과 다르게 「신과함께」의 성주신은 적극적이다. 성주신은 허춘삼과 그의 손자 허현동을 돕기 위해 현신한다. 고물을 주워 나르고 현동이의 공부를 돕는다. 결정적으로 저승차사들이 춘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막는다. 최소 1000년을 한국 땅에서 지낸 그는 경제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금화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허술하게만 보이는 사천의 신들과 달리 성주신은 인간들에게 손도 대지 못함에도 듬직하다. 사천의 신들과 성주신의 차이는 현실의 비참한 상황에 공감하는 정도에서 비롯한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대적 상징들

「신과함께2」의 원작을 그린 주호민 작가는 용산 참사를 겪으며 해당 내용을 기획했다. 원작에서 묻어났던 작가의 죄의식은 옅어졌지만 「신과함께2」는 기본적으로 지금, 이 땅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몇 달 전 치러진 지방선거의 화두로 여전히 재개발이 다뤄지는 것만 봐도 달라진 것은 많지 않다. 풀리지 않는 매듭은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다.

‘신파’ 함께라는 조롱을 들었던 1편을 떠올리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군대의 부조리, 어머니, 죽음이라는 강렬한 상징들은 현대의 신화로서 그 위치가 공고하다.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조그만 방아쇠만 당겨져도 감정은 요동친다. 전작의 상징들은 재개발의 폭력성, 친족, 죽음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김용화 감독이 누누이 강조했듯 신파를 만들어낼 수 있는 디테일은 전작에 비해 약해졌다. 그럼에도 「신과함께2」가 흥행한다면 그것은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징들의 체계가 그만큼 훌륭하다는 방증이다.

「신과함께2」의 스틸컷.

정말 나쁜 인간은 없을까?

김용화 감독은 이번 영화를 말하며 신파 대신 ‘용서’를 강조한다. “나쁜 인간은 없어, 나쁜 상황만 있을 뿐이지”라는 성주신의 유언은 영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나쁜 인간은 없을까. 대놓고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인지 이승과 저승 그리고 과거를 오가며 진행되는 서사에는 뚜렷한 갈등이 보이질 않는다. 해원맥에 대한 강림의 질투는 어설프며, 덕춘은 마음 놓고 해원맥을 미워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해원맥의 증오는 오로지 관객들의 상상에 기대야 한다. 관객들은 애초에 미워할 대상도, 용서할 대상도 찾지 못한 채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야 한다.

전작에서 마음껏 미워할 수 있던 박 중위도, 원작의 무자비한 용역 깡패들도 「신과함께2」에서는 너무 밋밋하다. 때문에 마지막 재판에서 강림의 웅변은 공허하다. 이승, 저승, 과거의 갈등들이 봉합되며 극적 카타르시스를 뿜어야 할 마지막 장면은 따분한 도덕 수업 시간이 돼버린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빌려올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사회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항하는 무엇인가, 즉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은 항상 윤리적인 부르주아와 정치적인 부르주아의 확실한 구별을 수반한다. 결국 아방가르드가 정치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은 통렬하다. 윤리적 이데올로기로 모든 것을 통할한 「신과함께」는 관객들에게 미워할 이를 앗아갔다. 때문에 재개발 논리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허춘삼의 억울함은 해소되지 못한 채 신의 변덕과 같은 행운에 기대는 것으로 맺어진다. 

“의분을 느끼고 분노를 갖고서 착취를 끝낼 신은 어디에 있는가.” 사천의 신들처럼, 답을 하지 못하는 영화 「신과함께」가 못내 아쉬운 이유다.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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