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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지음, 산처럼 刊)
책산책 :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지음, 산처럼 刊)
  • 김동식 문학평론가
  • 승인 2003.06.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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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가 만들어낸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시공간

2001년 겨울이었으니 벌써 재작년의 일이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마련한 '인상파와 근대미술 : 오르세 미술관 한국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상파의 예술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다만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 기차역'을 직접 보고 머릿속에 담아 오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을 따름이었다.

경험의 역사성에 대한 재서술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철재와 유리로 만들어진 기차역 지붕 아래에서 두 대의 기차가 엇갈린다. 한 대의 기차는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파리의 건물들 사이로 달려가고 있으며, 다른 기차는 푸른색 증기를 내뿜으며 화면 바깥으로 달려나오는 듯했다. 예술적 환각이었을까. 두 대의 기차와 消失點 사이에서 근대적 시공간의 사실성과 몽환성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근대의 근원적인 이미지가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뜬금없이 모네의 그림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박천홍의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 가져다준 감동 때문이다. 정재정의 '일제침략과 한국철도'가 일제강점기의 철도부설과정을 실증적으로 고찰한 선구적인 연구였다면, 박천홍의 책은 철도와 관련된 문화사적인 연구로는 국내 최초의 저작이다.

저자는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근대초기의 사람들이 철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철도가 세계인식과 생활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식민지의 철도와 제국주의적인 질서의 내밀한 관련성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섬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근대성의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영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근대성을 이념형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 관련된 경험의 역사성을 재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책이다.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

기차란 무엇인가. 기차는 대포와 화륜선과 함께 근대성 또는 근대적 테크놀로지의 탁월한 상징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근대(현대)라고 한다면, 근대의 역사적 기원들 가운데 하나가 산업혁명이며, 산업혁명의 핵심에 증기기관이 놓여져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일 것이다. 피스톤의 폭발적인 왕복운동과 汽笛 소리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팡파르와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기차의 역사적인 의미는 근대적인 산업 발달이라는 측면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기차는 근대인의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에, 동시에 근대인의 무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상징적·상상적인 제도로서 기능한다. 시공간의 압축을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구축, 균질적인 공간인식과 국제적인 표준시의 도입, 전통적인 가치관의 해체와 근대적 질서의 구조화, 지역경제의 국민경제로의 수렴, 상상적 공동체로서 민족(의식)의 발명, 여행과 레저의 일상화 등은 기차와 관련된 역사적인 변화이자 근대를 구조화하는 원리들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기차는 근대문명의 축복인 동시에 제국주의적 폭력의 서막이었다. 기차는 근대문명을 향해 펼쳐져 있는 통로였던 동시에, 기층민중들의 피와 땀을 수탈하는 통로였다. 식민지 백성들은 기차를 타면서 근대이전의 신화적인 세계와 결별했고, 객실의 창을 통해서 근대문명의 파노라마적인 풍경을 꿈꾸듯이 바라봤으며, 수탈과 폭력의 제국주의적 현실로 짐짝처럼 내던져졌던 것이 아닐까.

'몸의 언어'로 표현된 근대성

우리에게 기차는 근대성과 식민성을 횡단하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질주이며, 한국사회가 경험한 압축적인 근대의 역사적 상징이다. 철도라는 근대의 원-글쓰기에 묻어있는 역사적 무의식들을 읽어내려 가는 저자의 시선과 손길이, 매혹과 공포를 한없이 왕복하는 이유도 한국철도의 운명적 표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운명이 손바닥의 손금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기차의 선로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드리워진 운명의 표정(근대성·식민성·분단)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기차는 저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표정이기도 하다.

"기차는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서랍에 들어 있다. 고향 마을의 맨 끝에 위치한 집에서 바라보면 멀리 기찻길이 보인다.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었다. 깊은 밤에 어슴푸레 눈을 뜨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였다. 그에게는 유랑민의 흔적 같은 바람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의 서늘한 품에 안기면 왠지 모를 서러움이 돋아났다."(서문에서 부분 발췌.)

유년기의 체험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던 기차를 역사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저자의 노력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이제 우리는 근대를 더 이상 풍문이나 구경거리로서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져본다.

조만간 저자를 다시 만나 유쾌한 술자리를 갖게 된다면, 그의 손금이 철도와 얼마만큼 닮았는지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아카데미즘 바깥에서 씌어진 그의 '학위논문'이 경의선·동해선의 개통과 때를 맞춰 발간된 것이 왠지 그냥 우연만은 아닐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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