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의 사진전이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진행 중이다. 그는 빌레펠트대 설립 위원회의 위원이었고, 1973년부터 정년인 1988년까지 빌레펠트대 역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독일사학계 및 독일학계에 좌표가 되는 작업들을 쏟아낸 가장 중요한 20세기의 독일 역사학자다.
라인하르트 코젤렉과 빌레펠트대
그는 57년에 제출돼 20세기 독일 아카데미에 제출된 정신과학 분야의 가장 탁월한 박사학위논문이라는 평을 유지하고 있는 「비판과 위기」(1959)를 통해 서독 아카데미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근대 정치사상의 출현을 계몽주의와의 변증법적인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이 작업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역사학적인 작업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작업이 사회철학적인 작업이었다면, 코젤렉은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역사학적인 작업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처럼, 슈미트의 비공식 지도를 받고 전후 금기시 되었던 슈미트의 이론, 특히 홉스해석에 학적인 시민권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1972년 출간되기 시작해서, 세계 역사학계에 전무후무한 이정표가 되는 『역사적 기본개념들』이라는 개념사 사전을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와 함께 편집한다. 베르너 콘체는 코젤렉의 교수자격논문인 『개혁과 혁명 사이의 프로이센』(1967)을 지도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가 도달한 역사학 작업들 중 하나이자 국역돼 소개된 바 있는 『지나간 미래』(1979)뿐 아니라, 『시간의 층위들』(2000), 그리고 그가 영면한 해에 출간된 『개념의 역사들』, 그리고 40년간의 논문모음집인 『역사의 의미와 무의미에 관하여』가 그의 주요한 작업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르페브르와 소불 이후 프랑스혁명에 대한 새로운 역사학적인 접근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푸레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럽 혁명의 시대 1780-1848』을 집필하기도 했다. 1971년 4월 ‘사회학과 역사’라는 제목의 저자 콜로키움에서 엘리아스를 초빙한 바 있는 그는, 또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빌레펠트대 내 학제 간 연구소인 ZiF의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엘리아스를 1978년 연구소로 초빙한다. ‘철학과 역사’라는 연구기획으로 엘리아스를 ‘20세기의 행동변화 문제와 자연시간과 역사적 시간의 관계 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것으로 초빙한 것인데 이후 엘리아스는 1984년까지 ZiF에 거주하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그밖에도 그는 빌레펠트대에 재직하면서 <시학과 해석학>, <행정> 등의 잡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과 사진, 정치적 도상학
세 군데서 진행 중인 이번 전시회는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작업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정치적 도상학과 다양한 형식의 이미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코젤렉의 또 다른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전시회이기도 하다. 그는 1960년대부터 사진, 그림, 스케치 등과 같은 이미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TV를 통해 중계될 때, TV화면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미지는 그의 역사적 시간 이론, 정치적 죽음숭배(Totenkult), 그리고 정치적 공간에 대한 감각을 연구하기 위한 대상이자 방법론적인 도구가 된다. 즉, 특정한 공간에서의 시간관계와 다양한 관점으로 분산되는 기념물들은 어떻게 사진, 기념물, 조형물들이 역사적인 질문 뿐 아니라 역사를 형상화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경험공간과 반성공간을 개시하는지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관점 외에 그가 정치적 도상학과 그와 관련된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의 문제에 주목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젊은 세대들과의 학적인 교류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학, 그리고 역사를 기술하는 고전적인 형식을 탈피하는 새로운 기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같은 시기 빌레펠트대 역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을 통해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론을 구축한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장한 이른바 ‘빌레펠트 학파’를 대표하는 한스 울리히 벨러와 동료 위르겐 코카가 주도한 잡지 <역사와 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역사학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역사학적인 작업에 대한 역사이론은 「강제적인 죽음의 정치적 도상학에 대하여」(1998)으로 정리된다.
정치적 죽음숭배
이번 전시회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작업들을 앞서 말한 세 곳으로 나누어 각각의 주제, ‘시간의 층위들’, ‘정치적 감각’, ‘정치적 기억의 수문’에 맞춰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세 개의 상이한 공간은 새로운 경험공간이자 역사적 기억들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새로운 반성공간이 되는 것이다. 도상학적 풍경의 전환은 정치적 감각의 변화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세 곳의 경험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기념물의 새로운 정치적 기능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동일성과 결합을 시각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의미를 고정된 답이 아닌, 산 자의 시간적이고 정치적인 감각에 따라 제기되는 새로운 질문에 있다. 즉 질문이 자신에게 역사화 되는 것이고 자신이 시간의 역사화를 주조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능력은 정치적 감각의 형식적인 언어를 넘어서기 때문에, ‘정치적 죽음숭배’는 시간의 층위들과 정치적 감각을 활성화하고, 정치적 기억의 형식화를 분산시키는 역사학적인 효과를 갖는다.
시간의 층위들
‘시간의 층위들’이라는 테마의 전시는 빌레펠트대 역사학과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는 「근대는 얼마나 새로운가」라는 글에서 “우리의 근대가 얼마나 새로운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전승된 역사의 얼마나 많은 층위들이 우리의 현재에도 포함돼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근대적인 시간원리를 제시한 코젤렉에게 ‘시간의 층위들’이라는 위상학은 근대에 가능해진 역사의 시간화의 차원에서 경험의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시계, 교통수단과 미래에 기억되기를 의도한 기념물들, 이런 사물들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 등은 역사의 단순한 연대기적인 흐름의 단락이 경험공간의 시간적인 기대지평이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확인하게 한다. 역사학과에 전시된 이 ‘시간의 층위들’이라는 기획전은 코젤렉의 이런 역사이론과 개념에 부합하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정치적 감각
‘정치적 감각’을 주제로 한 전시는 ZiF에서 진행 중이다. 코젤렉은 1998년에 ‘정치적 감각’에 대한 한 정식화에서 오감을 통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매개라는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특히 시각은 쉽게 유혹되지만 동시에 지각의 대상과의 신체적인 거리를 창출하기도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 전시는 감각을 통해 신체로 침투하는 정치적인 경험공간의 시각적인 탐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정치적인 것은 외부의 공간에서 뿐 아니라 매체를 통해 사적인 공간으로도 침투하기 때문에 정치적 감각은 오감 중에서도 특히 비판적인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을 갖는 시각을 통해 안과 밖의 구별,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의 구별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히 말과 기마상이라는 조형물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 전시물 중에는 그가 수집한 무수한 기마상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더구나 18세기 중반부터 100년, 즉 근대적인 시간구조로의 결정적인 이행기를 그가 ‘말안장의 시대’(Sattelzeit)라 명명한 것을 고려하면, 그에게 말과 기마상이라는 상징, 그리고 그 정치적 도상학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말은 지배의 상징으로서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있었지만, 근대에 들어 말은 영웅적인 기능을 상실하면서 사적인 자유의 공간에서 향유할 수 있는 소비물로 전환됐다. 말은 밖에서 안으로, 사적인 경험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시대의 전과 후의 전환을 명확히 보여주는 말과 그에 대한 정치적 도상학은 새로운 정치적 현실에 대한 감각을 극적으로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정치적 감각의 차원을 고려할 때, ZiF 전시회에 마르크스와 구동독의 여러 조형물들이 함께 전시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억의 수문
‘기억의 수문’이라는 제목은 코젤렉의 1984년 강의인 「기억의 수문과 경험의 층위들」에 기반하고 있다. 빌레펠트 미술협회에서 진행 중인 ‘기억의 수문’이라는 테마는 제1, 2차 세계대전의 전개와 그에 따른 기억의 상이한 형식들과 장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전쟁 이후의 사회적 의식의 변화를 수반하는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의 기억을 통한 정체성의 구성과 사회적 배제라는 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는 정치적 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제3제국 시기의 희생자들, 그리고 다양한 인구집단, 양차 대전에서 희생된 군인들, 몰살당한 유럽의 유태인들, 파괴된 유태인 교회당, 천민취급을 받은 동성애자들, 법적인 보호의 외부에 있었던 집시들에 대한 기록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실제로 범죄가 집행되고, 희생자들이 집단적으로 양산된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그대로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기획은 과거장소의 구조 뿐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의 구조의 요소들까지 포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공간적인 장소화의 문제는 기억의 물질성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더불어 전쟁경험과 대량학살에 대한 재현불가능성이 어떻게 기억의 수문을 끊임없이 현재화하고 경험의 층위를 어떻게 중층화하는지 역사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그래서 이 전시회에서는 ‘지금’ Jetzt 라고 적힌 담벼락의 낙서가 대표적인 사진으로 전시돼 있는지 모른다.
역사의 시간화와 역사의 역량
이렇게 코젤렉의 정치적 도상학은 ‘시간의 층위들’, ‘정치적 감각’, ‘기억의 수문’을 통해 시간적인 구조와 정치적인 사건의 관계를 일상의 경험공간으로, 감각의 차원으로 끌고 들어온다. 역사의 기억은 그 수문을 통해 기억의 정치학의 문제, 정체성 구성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이어서 역사를 감각하는 것은 동시에 역사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두기에 다름 아니다. 과거와 미래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렇게 역사의 근대성은 우리의 경험가능성을 매번 벗어난다는 역사의 시간화에 대한 코젤렉의 인식은 미래에 발생하는 경험이 시간의 수문 앞에 개방돼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역사가 시간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간 안에서 시간과 더불어 강해진 역사의 힘, 그 안에서 경험하는 기대지평의 중층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빌레펠트의 세 곳에서 진행 중인 정치적 도상학에 대한 코젤렉의 전시회는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김건우 빌레펠트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