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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客의 군침을 흘리게 한 국수의 탄생
食客의 군침을 흘리게 한 국수의 탄생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문학
  • 승인 2018.07.1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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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23.국수와 인간의 인연 ② 인간을 웃게 만들다

며칠간 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요 며칠은 비가 끈덕지게 내린다. 오랜 습관은 버리기 어렵다고, 어려서부터 빙과류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성인이 된 지금도 여름철엔 냉장고를 뒤져 아이스크림이나 콜라 따위를 먹고 마신다. 50여년 전 내가 어린 시절 아이스크림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처럼 사시사철 각양각색에 맛도 다른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을 못했다. 바다를 건너고 사막과 초원 산림을 넘어 존재하는 다른 나라 낯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스크림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무더운 여름날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더위에 지지 않을 용기를 주는 빙과류는 모두 이슬람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안 건 또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물론 아이스크림 산업의 성공은 아랍세계 혼자 이룩한 위업이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셔벗과 소금이 아랍으로 전해졌고, 무슬림들은 이걸 가지고 새롭고 흥분되는 묘한 마약을 만들었다. 몸에서 솟아나는 땀조차 금세 증발시켜 소금으로 만드는 아랍 여름을 일거에 물리치는 희고 끈끈한 먹거리. 튀니지에 근거지를 둔 사라센 해적은 시실리와 나폴리 등 해안지역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질을 하면서도 얼음과자를 만들어 먹었다. 해적들 때문에 견디다 못한 교황이 나서 이단인 사라센 해적의 수장 에미르에게 엄청난 돈을 바치고 한시적 평화를 얻은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해안 도시국가들은 원수인 사라센들이 미소 지으며 먹는 이 물건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맛있고 맛있는 젤라토는 아랍세계로부터의 수입품이었다. 참고로 에미르 혹은 아미르(emir or amir)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族長, 大公, 土侯 또는 이슬람의 창시자 모하메드(Mohammed)의 자손을 가리키는 칭호다.    

최초의 국수 장인

영어로 noodle, 이탈리아어로 spaghetti, macaroni, pasta 등으로 불리는 국수를 아랍어로는 almaekruna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국수는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始原地는 있을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에 있는 儉龍沼이듯, 국수를 처음 개발해 주변에 국수문화를 전파한 최초의 국수 장인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이나 직업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해도 어렴풋이나마 인류에게 국수 먹는 행복을 선물한 주인공을 추적하는 것은 국수 이야기를 쓰는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앞의 글에서 밀의 동진을 얘기했다. 그리고 지금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던 투르판 분지(현 중국 서부 신장성)에 일단의 유목민이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유구라는 인물이 1800년대 초에 지은 『饔凞雜志』에서 “乾한 것은 餠이라 하여 시루에 쪘으며, 濕한 것은 麵이라 하여 끓는 물에 삶거나 물에 넣은 것이다”라고 기록했다(饔: 아침밥, 조반, 익힌 음식, 조리한 음식 옹/凞: 빛날 희). 이로 미루어 조선 말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밀을 가루 내어 떡처럼 시루에 쪄서 먹고, 진국수는 끓는 물에 넣고 삶아 먹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런 가늘고 긴 면을 뽑아내는 기술이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자장면의 탄생지 차이나타운 사진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자장면의 탄생지 차이나타운 사진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최초의 밀가루 음식은 아마 밀가루 반죽을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넓게(얇게) 펴서 끓는 물에 넣고 삶아 먹는 이른바 수제비 비슷한 요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에서는 면의 기원을 한나라 때로 보고, 당시 면류를 餠이라 하고, 국물과 함께 먹는 것은 湯餠이라 불렀다. 魏晉 시기의 문헌에 ‘수인박돈(水引餺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최초의 국수제조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宋代에 이르러 현재의 국수와 같이 길쭉하고 날씬한 생김새와 제조법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중국 측 학자들의 견해다.

문물교류의 측면에서 볼 때 실크로드를 오가는 각국의 상인과 불교 승려들에 의해 국수 문화는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국제도시였던 당나라 수도 장안(오늘날의 시안), 송나라의 수도로 인구 백만의 대도시였던 개봉(카이펑) 등은 국수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다. 서역과 가까운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등지는 오늘날에도 온갖 국수가 食客의 군침을 흘리게 하고 있다. 수타 방식으로 땀 흘려 만든 면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됐듯, 우리는 메밀국수를 일본에 전해줘 그곳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7세기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년) 초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 머물렀던 조선 승려 元珍이 한 일이다. 가케우동은 대당구법승이었던 일본 승려 弘法 혹은 空海가 자신이 직접 익힌 솜씨를 본국에 돌아가 선보인 결과물이었다고 전한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낯선 이들의 미각에 어필해야 하는 밀가루와 물의 조합은 현지에 적응하며 때로 독특한 모습으로 살아남아 결국은 면류의 寵兒가 되었다. 산동성 출신의 중국인이 많았고, 부두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욕을 만족시켜야 했던 인천 연안부두 일대의 華僑들은 전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짜장면의 성공신화를 썼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수사들이 양어장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기른 물고기를 신자들에게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신도들에게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국수는 먹어서 맛있기도 하려니와 판매 수익을 올려 스님들을 기쁘게 하는 ‘僧笑’였던 것이다.  

국수의 유래

무릇 인간의 발명이나 발견은 우연히 이뤄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채식주의자인 나도 좋아하고 전 세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譽讚하는(기릴 예/기릴 찬) 두부는 秦漢시대 발명(?)됐다. 楊衒之의 『洛陽伽藍記』를 보면 西漢 시대 淮南王 劉安과 그 막료들이 “썩은 콩이 유지가 되어 그 이름을 두부라 한다(腐豆爲乳脂, 名曰豆腐)”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이트 와인이 보관 잘못으로 발효가 된 바람에 발포성 과실주 샴페인이 탄생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불량 스파클링 와인은 버림을 받는 대신 ‘돔 페리뇽’이라는 이름을 달고 샹빠뉴(샴페인의 프랑스식 발음)라고 불렸다. 샴페인의 황제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실수가 필수가 되어 축하주, 기념주, 건배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샴페인은 이웃 나라로 가서 다른 이름으로 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어로는 스파클링 와인, 독일어로는 젝트, 스페인어는 카바, 이탈리아로는 스뿌만떼 등으로 불리지만 콘텐츠는 다 거품을 생명으로 하는 발포성 과실주다. 

이왕이면 同價紅裳? 뚝배기보다 장맛?

돼지를 본때 보고 잡느냐는 말이 있다. 맛이 최고지 생김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음식을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고 눈으로 먼저 맛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시각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식품은 이미 식품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본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면 시각과 미각은 전혀 별개로 기능하지만, 사람이라는 묘한 존재는 분위기에 따라, 섭취할 대상의 미추 여하에 따라 다른 맛을 느낀다. 그래서 비 오는 날 마시는 커피맛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의 커피맛이 다르다. 

일본 다도의 기본 원리는 ‘和·敬·淸·寂’이다. 으뜸이 조화(harmony)로 차를 대접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다실과 사람 마음의 맑고 깨끗함, 그리고 고요함에 앞선다. 물론 네 가지 요소에 차등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이 가운데 조화로움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의 마음가짐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는 의미다.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허겁지겁 먹는 일에만 몰두하거나, 남들이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당기는 것, 맛있는 것을 독점하다시피 혼자 마구 먹는다거나, 옆에서 말을 걸어도 데면데면 성의 없는 답변을 하고 눈길과 마음은 시종 먹는 것에 가 있다든지, 많이 배불리만 먹을 수 있다면 쓰레기 더미 옆이든 한밤중이든 가리지 않을 태세라든지 하는 것은 과거와 달리 먹을 걱정을 거의 안 해도 되는 시절 인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분위기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눠 먹는 곳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을까? 그래서 밥술을 들어 음식을 먹다가 문득 바라본 주변,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따라서 음식 맛이 황홀하게 느껴질 수 있다면 그게 우리의 음식을 먹는 아름다운 행위이지 않을까? “창밖 풍경까지 맛에 담는다”는 일본 어느 메밀국수집 주인의 정성과 멋, 이미 그 집의 국수는 최상의 맛을 지니고 있다.

그 국수집 창업주는 되풀이 되는 흉년으로 굶어죽는 일이 다반사였던 19세기 말, 오래전 조선의 元珍 스님이 구황작물로 씨앗을 일본으로 가져가 심어 기른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소바 즉 메밀국수의 맛은 신선함이 생명이다. 국수를 삶아 물에 헹군 후 물기를 빼고 오래 두면 맛이 떨어진다. 메밀국수는 즉석에서 만들어 즉석에서 먹을 때 가장 맛이 있다. 수타 방식으로 메밀국수를 만들면 면발의 쫄깃함과 탄력이 오래 간다. 일본 사람은 12월 31일을 大晦日이라고 한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찾아오는 한밤중 12시에 일본 사람들은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다. 전 해를 뒤이어 찾아오는 다음 해에도 메밀국수 가락처럼 길게 행운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소박한 의식이다. 
우리도 국수를 吉祥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언년아, 너 언제 국수 먹게 해줄 거니?” 윗마을 당숙이 물으면 언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여기서의 국수란 잔치국수를 말한다. 국수를 삶아 채반에 올려 물기를 뺀 다음 멸치 삶은 물에 국수를 담가 젓가락을 사용 후루룩 서너 번에 먹기를 끝내는 잔치국수. 글자 그대로 잔치국수는 잔치 음식이다. 회갑 잔치, 생일 잔치, 혼례 잔치 때 축하의 의미와 장수에 대한 기원을 담아 이 국수를 하객들에게 대접한다.

먹는 일이 문화가 되기까지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르판 교하고성터 사진 출처=두산백과

국수가 단순히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가느다란 면 가닥이 되기까지 인류는 서로 다른 환경 속 각각의 자리에서 약속이나 한 듯 끝없이 밀가루 반죽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밀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을 만들어 끓는 물에 넣는다고 그게 먹거리의 완성이 될 수는 없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 인류의 음식문화는 화려하게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경험을 통한 지식의 습득과 축적이 문화를 형성한다. 밀가루 반죽을 날로 혹은 통째로 먹지 않고 불에 굽거나 물에 넣고 끓여 먹으면 속이 시원하다. 맛이 있다. 최적화된 맛을 찾아내기까지 인류라는 요리사는 오랜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맛에 관한 한 21세기 인류는 행복하다. 

그런데 맛은 길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어른들이 타향살이 제일 큰 설움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이를 오늘날 남성의 버전으로 한다면, 결혼 후 인생살이 가장 큰 불행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음식의 두 축은 맛과 건강이다. 맛없는 건강을 택할 것인지, 유해하되 맛있음을 택할 것인지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나는 오랜 세월 아침을 거르는 생활을 해왔다. 「비긴 어게인」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가수 박정현과 헨리가 아침 식사로 오믈렛과 커피를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맛은 길들여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저녁 식사로 빵과 밥 그리고 햄버거 중에서 무엇을 먹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밥’이라고 답할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길들여진 밥의 맛, 그 맛이 내게는 최고의 맛이기 때문이다. 

국수의 어원

우리는 ‘국수~국시’ 등으로 말하는 면류식품을 영어로는 ‘noodle’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언어의 자의성(arbitrariness)라고 하지만, 왜 ‘밀가락’이라고 하지 않고 ‘국수~국시’라고 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음으로 결과가 있다. ‘국수~국시’라는 언어 표현은 선택의 결과다. 선택의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noodle부터 짚고 넘어가자. 

미국 이민사에 있어 네덜란드인들은 중요한 이주 세력이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어에 속하는 네덜란드어는 미국영어 속에 다양하게 침투됐다. 1846년부터 대륙 중서부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은 bakery, bake-oven, bake-pan, bedpan, bed-spread, blickey, boodle, boonder, hoople, knicker & waffle-iron(household), coleslaw, cookie, noodlejees, olykoek, pot chees, smear-case, speck & waffle(food), beer-hall, dance house & kirmess(social life), stoop(stoep = sidewalks)와 같은 어휘를 신대륙 영어 속에 이식했다. 이 중에 noodle의 복수형 noodlejees가 있다. 

이로 미루어 영어 어휘 noodle은 그 기원을 네덜란드어 noedel에 두고 있으며, 후자의 기원은 독일어 Nudel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영국 영어에서 noodle은 가늘고 긴 밀가루 반죽 가닥을 포함한 아시아식 제품을 가리키는 반면 미국 영어에서는 영국 영어에서 pasta라고 하는 유럽식 제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본어로 국수는 우동이다. 중세국어에서 우리는 ‘국슈’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국수를 미엔(麵)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디 밀가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麵의 篆文으로 麪(밀가루 면)이 있다. 이 글자에서 보리 맥 옆의 丏(가리다, 토담 면)은 音을 나타내는데, 綿(이어지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다)과 통하여 이어지다는 뜻을 지니며, 반죽하면 실 모양으로 이어지는 ‘밀가루’의 뜻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수는 그 이름을 대자면 열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폈다 해야 된다. 중국에는 무려 1천200여종의 국수 요리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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