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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감 테니스 사랑
노벨상감 테니스 사랑
  •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
  • 승인 2018.07.02 11: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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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현 DGIST 교수

“당신의 테니스 열정은 노벨상감이야.” 
아내에게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 내가 너무 테니스를 좋아하고 사랑했기에 아내의 테니스에 대한 애증을 표현한 말이리라. 

1970년대 중반 카이스트 대학원에 다닐 때 테니스 대회가 있었다. 학과(산업공학과)의 19명 동기 중 테니스 실력 19등. 공을 칠 줄도 몰라 파트너만 믿고 라켓을 들고 네트 앞에 그냥 서 있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너무 창피해서 라켓을 들고 그 다음 날부터 벽치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그리고 1980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스탠퍼드대에 도착했을 때 학생 중에 테니스를 잘 치는 선배가 있었다. 그 학생은 후에 정통부장관이 되는 진대제였다. 고교·대학 선배인 진 선배는 나에게 “테니스를 배우려거든 제대로 배우라”고 권유했고 나는 스탠퍼드대의 테니스 강의를 하나 신청해서 들었다. 

이후 나의 광적인 테니스 사랑은 시작됐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존 매켄로가 스탠퍼드대를 1년 다니고 중퇴했던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테니스에 빠진 건 일리노이대로 옮긴 후의 일이다. 대학 시절 테니스 선수였던 동갑내기 유학생 친구가 내게 “너는 아무리 연습해도 나를 이기진 못할걸”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만큼 테니스는 일찍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집에 와서 끙끙 앓았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 매일 혼자 벽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어느 날 나는 그 친구에게 단식게임을 제안했다. 그리고 여러 친구가 보는 가운데 나는 첫 세트를 이겼다. 얼굴이 붉어진 그 친구는 다시 한 세트를 더 제안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두 세트를 모두 이기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혼자 이불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노력으로 무언가 극복했다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테니스에 광적으로 빠진 몇몇 유학생 친구들과 함께 거의 매일 테니스를 치던 시절 어머니가 방문했다. 어머니는 “언제 졸업할 거냐?”라며 걱정하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테니스에 몰입했던 친구들은 모두 박사과정을 남보다 먼저 끝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테니스광들은 공부도 그 정열로 열심히 한 이유이리라. 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2개월간 운동을 쉬게 되었을 때 의자에 앉아서 서비스 연습을 했던 일화는 지금도 그 대학의 유학생들 사이에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1989년 귀국 후 나는 대한테니스협회 이사로 들어갔다. 어느 날 협회에서 국제심판 자격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영어 회화가 가능하니 선수 출신도 아닌 나더러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필기시험, 실기시험을 통과해 국제심판이 되니, 1998년 한 TV 방송국에서 테니스 해설을 제안해 왔다. 매주 비행기를 타고 포항과 서울을 오가며 테니스 중계 해설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공대 교수가 테니스 중계 해설을 한다고 주요 신문에 화제로 보도되기도 했다. 

1998년 내 이름을 딴 ‘STA 테니스 아카데미’라는 한국 최초의 테니스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이어 다음카페에 ‘단식테니스 매니아(단테매)’라는 단식 테니스 전국 클럽을 만들었다. 지금 STA 아카데미는 이병구 코치가 계속 이어가고 있고, 단테매는 회원 1만5천명의 전국 최대 규모의 테니스 클럽으로 성장했다. 

얼마 전 한국 테니스계에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정현이라는 어린 선수가 메이저 테니스대회인 그랜드슬램 토너먼트(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미국오픈) 호주오픈에서 본선 4강까지 가는 기염을 토했다. 정현의 코치진이었던 석현준 코치, 손승리 코치가 모두 STA 아카데미 출신 선수, 코치였기에 나의 기쁨은 더 배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국은 그동안 불가능으로 여겼던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결국 금메달을 따내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왔다. 골프 박세리, 수영 박태환, 피겨스케이팅 김연아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에서 들판에서 시달리며 경쟁력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모든 분야, 특히 기술 과학 분야도 이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기술 과학 분야도 열린 경쟁 속에서 경쟁력을 키우고 야생마처럼 자라야만 우리가 그리도 목메는 노벨상도 탈 수 있을 것이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현 DG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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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2018-07-28 00:22:13
단테메 카페를 교수님이 만드신거군요...단식 테니스가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번 확산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