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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비잔틴 제국 멸망의 의미
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비잔틴 제국 멸망의 의미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6.25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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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학교_4강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이스탄불의 탄생」

새로운 중세 이해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는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시대의 탁월한 저작이다. 수백명의 관련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종래 판에 박힌 중세의 이미지와 관념을 실증적으로 해부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중세라는 실체를 새롭게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다. 최고의 지적 결실이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다”는 도발적인 화두로 시작된 이 작업으로 악마가 득실되는 시대가 아니라 적어도 건강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고전과 과학, 예술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충분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시기로 중세를 탈바꿈시켜 놓았다. 그에 따르면 끔찍한 화형과 더불어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리던 때는 오히려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것도 충격이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파문 재판을 하던 때가 1633년이나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에코가 새롭게 조망하려고 했던 <중세>도 철저히 유럽중심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그도 태생적으로 유럽인이었고 라틴문화 우월론자였고 기독교 세계의 인식틀을 깨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 일관되게 라틴 유럽 문화는 “우리”로 표현되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의 미학적 관념체계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청록색 눈동자, 장밋빛 피부, 눈처럼 하얀 얼굴, 황금빛 색채"로 표준화되었다. 중세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이자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이슬람혐오주의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철학을 박사학위 주제로 연구한 것도 에코가 가지는 인식의 한계로 작동하고 있다. 그에게 중세는 로마가 멸망하는 476년부터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1492년까지 1016년의 긴 기간이다. 한편 비잔틴 역사에서 보자면 중세의 시작은 476년으로 대체로 동일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이 정복당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을 중세의 끝으로 본다. 중세를 977년간으로 보면 근대의 시작이 동방에서 39년이나 빨리 시작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중세를 마녀사냥과 암흑기라는 키워드로 폄훼하는 종래의 이미지 역사 해석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천년 이상의 유럽 중세동안 인류 최고수준의 과학과 문명, 예술과 거브넌스가 작동하고 있었던 이슬람 세계나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1123년(330~1453)간이나 존속해 온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다, 그래서 이슬람 세계의 중세상황을 동시대적 비교분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유럽 중세의 본질을 더욱 통찰력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중세

476년 로마가 게르만 군벌세력에 멸망한 당시 오리엔트에는 파르티아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4~651CE)이 존속하고 있었다. 사산조 파르티아는 유프라테스 강을 큰 경계로 해서 로마와 그를 이은 동로마제국과 쟁패하면서 651년 아랍-이슬람 수중에 멸망할 때까지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문화로 알려진 용광로 속에 페르시아 문화요소가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이어지는 실크로드 문화교류의 서쪽 축을 형성하면서 유리, 복식, 산물의 이동 등에서 우리문화의 성숙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고 독특한 정교일치 체제를 구축했으며, 제국의 멸망으로 종교가 소멸하는 비운을 맞았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으로 중동-이슬람 세계는 이란 중심에서 아랍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 왕자일행이 신라에 망명하여 신라공주와 결혼하여 사랑을 나눴다는 <쿠쉬나메>라는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가 발견되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압바스 제국 시기(750~1258CE)에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이슬람 제국은 아랍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및 인도 문화를 흡수하여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은 광대한 피정복지의 문화를 수용하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슬람 문화는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 시대에 가장 번성했는데, 이때 바그다드에 설립되었던 바이트 알-히크마(bait al-hikma, 지혜의 집)는 외국어 문헌의 종합 번역센터로서 이슬람 문화의 국제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당이었다. 지혜의 집은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을 모델로 조성된 일종의 왕립연구기관으로서 천체관측을 위한 알샤마시아 천문대와 병원 시설 등이 함께 들어섰다. 

칼리파 마문 시대에는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외래 학문에 대한 연구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중요한 철학서와 과학서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900년까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학자들의 저술들이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이븐 시나(980~1037)와 스페인의 무슬림 학자 아베로스(1126~1198)는 이 시기에 활동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철학 체계를 세운 대표적인 학자였다. 아랍어로 옮겨진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풍부한 고전들은 후일 이베리아 반도의 톨레도 반역소를 중심으로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서유럽에 전해졌고, 유럽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었다. 

무슬림들은 자연과학에서도 매우 발달된 수준을 이룩하였다. 수학에서는 그리스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영향을 받아 아라비아 숫자 체계와 영(0)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그들은 삼각법, 해석기학, 대수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천문학에서는 경도와 위도,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했고, 천체 관측기구를 만들어 지구 구체설을 증명하였다. 이슬람력의 원리는 원나라 때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태음력의 정비와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의학에서는 예방의학과 외과수술이 성행하였으며, 대표적인 의학자인 알-라지의 《의학대전》과 이븐 시나의 저술들은 유럽 의과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재로 사용되었다. 화학 분야에서는 승화 작용이나 증류법과 같은 화학실험 방법이 고안되었다. 알칼리, 알코올 등의 아랍어 용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 미술에서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교리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은 발달하지 못했다. 대신 둥근 돔과 아치, 첨탑을 특징으로 하는 모스크(사원) 건축과 화초 문양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아라베스크가 유행하였다. 특히 아랍 어나 꾸란 구절을 예술적인 서체로 표현하는 이슬람 서예가 매우 발달하였다. 음악 역시 금기시되었는데, 일정한 기법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음률의 꾸란 낭송이 최고의 음악으로 간주되었다. 아랍 문학은 이슬람 이전의 유목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현세를 노래하는 정열적인 시와 노래가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압바스 시대 이후에는 페르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산문이 발달하고 궁정 문학이 유행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이다. 이 작품은 9세기 페르시아 작품을 번역한 <천화>를 바탕으로 하며, 아라비아와 인도 등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요소가 합쳐져 대표적인 이슬람 문학으로 알려졌다. 

1258년 몽골 침략으로 압바스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전역이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슬람의 중세는 대혼란시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약 50여년간의 혼돈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한 세력은 종래 아랍민족들이 아니 투르크계 민족이었다. 셀주크 투르크를 이은 오스만 제국의 탄생이었다. 메흐메트 2세(1429~1481)가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그는 지상목표를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두었다. 제국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비잔틴과 유럽 국가와의 군사적 연계를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미 사방이 오스만 제국에 차단되어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한 성곽 도시로 전락한 상태였다. 특히, 동방 무역의 이익을 독점한 오스만이 지중해와 유럽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필연적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종교적인 배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즉,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하마드가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을 당부한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그 때까지 아랍 인에 의한 7차례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시도되었다. 이처럼 비잔틴 정복은 무슬림들의 영광스러운 사명감을 완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점령 준비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보스포루스(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고 좁은 해협)의 양안에 성채를 짓고 교역로를 통제함으로써 비잔틴에 경제에 결정적 압박을 가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수도인 에디르네를 출발하여 1453년 4월 5일에,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도착했고, 54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드디어 5월 29일 새벽 2시 토프카프(Topkapi) 성벽이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일시에 점령됐다. 
 
콘스탄티노플 점령의 의의와 영향

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세계 역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이라는 동방 문화권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동방의 새로운 기운과 문명을 급속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곧바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스스로 ‘지리상의 발견’이라 불렀던 대항해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진출로 오리엔트 지역을 통한 종래의 동서 교역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새로운 동방 해상 항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신항로 탐험은 오스만 투르크족의 진출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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