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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훌륭한 유권자인가
당신은 훌륭한 유권자인가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8.06.1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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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12_ 6·13 지방선거와 투표권

“저는 지난 2007 대선과 2012년 대선에서 이명박과 박근혜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두 전직 대통령이 무수한 죄목으로 구치소에 구속되는 것을 보고 참담한 심경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정치지도자를 평가하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선거에서 기권할까 합니다. 내가 투표를 잘못하면 타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니까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잘못된 투표를 통해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한 유권자로서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서 억울한 피해를 보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약 어느 유권자가 이런 말을 하며 이번 지방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를 칭찬해 줘야 하는 것 아닐까? 

투표의 윤리학

흔히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 제도, 즉, 시민들이 정치적 자기지배(self-government)를 실현하는 정치 제도라 여겨지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옳지 않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 투표한 유권자들은 분명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문재인이 아닌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정치적 운명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선거에서 승리한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 뿐이 아니다. 선거권이 없는 어린이, 청소년, 국내 거주 외국인, 제소자 등의 정치적 운명 역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선거에서 승리한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내가 대선에서 투표하는 것은 단지 나만의 대통령을 결정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전체의 대통령을 결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유권자의 투표 행위는 자기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 철학자 밀(J.S. Mill)이 말한 ‘타자관계적(other-regarding) 행위’다.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공익을 위해 부여된 공적 권능(power-rights)이다. 그리고 모든 권능의 행사가 그러하듯 선거권의 행사는 잠재적으로 수많이 이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일 미칠 수 있는 공적 활동이다. 잘못 행사될 경우 타인의 삶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투표에도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불편한 진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유권자가 투표를 잘못했을 때 어떤 참혹한 결과가 발생하는지 잘 보여줬다. 세월호 참사는 그 단적인 예이다. 그것은 대통령과 정부가 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얼마나 무능하고 나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무능과 나태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가장 명증하게 보여준 교과서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들은 무능과 나태를 넘어 사악하기까지 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에 대한 특조위의 활동을 방해했고, 그것도 모자라 세월호 유족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여론몰이도 서슴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박근혜 정부가 대한민국 유권자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하여 탄생했다 것이다. 실제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87년 민주화 이후 50%를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이는 우리를 또 다른 불편한 진실로 이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박근혜 정부에 있을지 몰라도,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해 그에게 국가수반으로서의 권력을 위임한 유권자들에게도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은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최소한 도의적인 미안함은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뿐이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무능, 부도덕, 부패로 인해 한국 사회 전체가 정치적으로 퇴보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억울한 희생을 겪어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직장에서 내쫓긴 이들부터, 부당한 공권력의 사찰로 피해를 본 이들, 블랙리스트에 올라 수많은 차별을 견뎌야 했던 문화예술인들 등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들다. 이 모든 이들에게 있어 불행의 시작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이 그들의 불행에 대해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국민MC' 유재석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홍보 영상에 출연해, 오는 13일에 진행되는 '6.13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투표를 독려하고 있는 모습. 사진 캡쳐=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민MC' 유재석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홍보 영상에 출연해, 오는 13일에 진행되는 '6.13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투표를 독려하고 있는 모습. 사진 캡쳐=중앙선거관리위원회

투표는 의무인가?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하는 것은 유권자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요즘 투표가 유권자의 의무임을 강조하며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TV 광고나 길거리 현수막을 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로마스키(L. Lomasky)와 브래넌(G. Brennan)은 「투표의 의무가 있는가?(Is There a Duty to Vote?)」라는 그들의 논문에서 많은 이들의 상식적 믿음과 달리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해 투표할 도덕적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호소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물론 현대 정치철학계에서 로마스키와 브래넌의 주장에 대해 이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폭넓은 공감대가 있다. 선거권의 행사가 타인의 삶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치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결여돼 있거나 그러한 정보를 시대정신에 비춰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능력이 결여된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반드시 공공선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해 좋은 투표를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아예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선거에 참여해 나쁜 투표를 행사하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명박을 선출한 2007년 대선과 박근혜를 선출한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은 훌륭한 정치지도자를 분별해 내는 자신들의 안목에 대하여 한 번 쯤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본다. 자신들의 선택 때문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억울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 대목에서 그들이 진정 공공선을 추구하는 도덕적인 유권자라면 정치지도자를 분별하는 자신들의 안목이 부족하다는 점을 깨끗이 인정하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선거권을 포기하는 것도 한 번 쯤 생각해볼 만하다.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해 투표할 도덕적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마스키와 브래넌의 주장이 옳다는 가정 하에서 선거에 참여해 나쁜 투표를 행사하는 것보단 선거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것이 공익에 더 부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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