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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해외 포닥
그땐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해외 포닥
  • 고경철 전남대·화학교육과 조교수
  • 승인 2018.06.11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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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박사학위자분들이 그렇겠지만, 학위 취득 후 안정된 자리를 잡기 위해선 박사후연구원(포닥) 시절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다양한 시련들을 겪게 되는 것 같다. 필자도 2013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국내에서 포닥을 하던 중 해외 포닥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곳에 메일을 보냈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리가 없다’, ‘펀드가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펀드를 따야 했고, 포닥 지도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한국연구재단의 학문후속세대 박사후국외연수지원 사업과 유럽의 마리큐리 장학금을 신청했다. 마리큐리 장학금은 시간이 촉박해 접수 3일 전에야 겨우 겨우 초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고, 포닥 지도교수님께서 한 번밖에 봐주시질 못했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이후 지원서를 새롭게 작성해 여러 번의 수정 과정을 가진 뒤에야 박사후국외연수지원에 선정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국 연구자가 거의 없는 낯선 바르셀로나대학에서 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포닥 지도교수님은 필자의 박사학위 연구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연구를 박사과정생 한 명과 함께 진행해보라고 권했다. 물론 지도교수님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박사학위 과정 동안 필자가 누렸던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지도교수의 연구 프로젝트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는 유럽의 방식이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또한 연구 주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관련 문헌들을 읽고 박사과정생과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스스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연구에 매진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계획했던 일정들을 끝내지 못했다. 연구 실적 때문에 앞을 내다보기가 두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3, 4년 후를 내다보고 연구의 호흡을 길게 잡자는 다짐뿐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다양한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내가 참여한 공동연구들이 꼭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실적에 대한 조바심을 덜어냈다. 바르셀로나의 연구실에서는 매일 11시와 16시에 커피 타임을 가졌는데, 이 시간에 평소에 품었던 연구 아이디어들에 대해 동료 연구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었고, 다양한 공동연구들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필자가 새로운 연구 주제를 다른 포닥에게 함께 진행해보자고 제안도 했고, 연구교수와 맥주 마시러 가는 길에 나눈 대화에서 참신한 연구 주제를 제안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공동연구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학과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고 있어야 하고,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언제든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뚜렷한 연구실적을 낼 순 없었다. 그렇게 2년의 해외 포닥 기간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던 모교 지도교수님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때 필자는 바르셀로나에서의 해외 포닥을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찾은 모교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해외 포닥 기간에 진행했던 연구들을 하나하나 마무리해나갈 수 있었다. 박사 과정을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학생의 연구도 직접 지도해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해외 포닥 기간 연구의 첫 논문이 저널에 개제되고 나서, 신기하게도 스페인에서 진행하려 했지만 진행하지 못했던 공동연구들이 차례차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약 1년여의 시간이 지나자, 연구소나 학교에 지원이 가능할 정도의 논문 실적이 갖춰졌고, 몇 날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기다린 끝에 지난 3월 한 국립대 조교수직에 임용될 수 있었다. 

필자는 과거 대학교 1학년 일반화학 수업에서 “분자 오비탈을 이해하면 화학의 모든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라는 한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자 오비탈을 다룰 수 있는 물리화학 전문가가 되자”라는 막연한 꿈을 품었었다. 강의실에서, 교정에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나도 그들에게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다고 다짐한다.
 

고경철 전남대·화학교육과 조교수
성균관대 화학과에서 물리화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산화학을 이용해 유기자성물질과 광촉매 소재 개발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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