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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센인들이 가져다준 천상의 맛…달콤함이 선사하는 妙味
사라센인들이 가져다준 천상의 맛…달콤함이 선사하는 妙味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8.06.04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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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 _ 21. 설탕이 만든 기적

사랑은 설탕처럼 아니 그 이상 달콤해야 한다. 사랑보다 달콤한 것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나, 연인을 부를 때 달콤한 맛의 수식어나 용어를 사용한다. Sweetie, sweetheart, honey, sugar, darling 등등. 물론 문화적 차이는 존재한다.

물은 속성상 흘러가야 한다. 고여 있거나 갇혀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가 오로지 인도에서만 재배됐다면 인류의 음식문화는 단조로움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맛이라고는 전연 없는 아이스크림에, 불고기, 마카롱을 먹으면서 달콤함이 선사하는 묘미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니, 아예 몰랐을 것이다. 설탕을 첨가한 밀크 티와 설탕을 넣지 않은 밀크 티는 맛뿐만이 아니라 격조에도 차이를 보인다. 당분 섭취로 인한 심신의 편안함, 이완의 느낌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조급하고 신경이 예민해져 더 격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설탕은 평화의 식품이다.

단맛을 내는 설탕이 없고, 오직 쓴맛만의 커피를 마셔야했다면, 오늘날처럼 커피가 전 세계인의 음료가 됐을까?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사람도 설탕을 한 두 스푼 넣어 마셔야 단맛과 대비되는 쓴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터키시 커피나 아랍 커피, 지중해 커피가 다 설탕을 주요 재료로 쓴다. 물론 커피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의 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커피를 나눠 마시는 분나(buna)라는 이름의 커피 의례를 행할 때 그냥 순수하게 커피 맛을 즐긴다. 아이도 어른도, 할머니도 손주도 다 쌉싸름한 커피 맛에 익숙해있다. Buna는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Amharic)로 ‘커피’를 가리키는 말이다.

설탕의 역사

설탕이 이렇게 우리의 일상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데 설탕이 출현하기 전 인류는 어떻게 당분을 섭취했을까? 자연계에서 채취한 꿀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꿀은 귀했다. 때문에 꿀은 상류층의 기호를 노린 값비싼 교역품이었고 누구나 손쉽게 구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진2. 활을 든 큐피드 조각상. 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Cupid

다행히 사탕수수가 있었다. 원산지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지만,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 운남성, 귀주성 이하 남아시아 아열대 지역은 물론 이집트, 브라질 등의 중남미 국가, 그리고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로 분류하는 남태평양 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에는 따뜻한 기후 때문에 사탕수수가 자란다. 실제로는 현재 195개 국가에서 매년 15억 톤 이상의 사탕수수가 재배된다. 최대 산출국은 인도와 브라질로 이 두 국가의 수확량이 다른 국가들의 수확량 합계보다 더 많다. 설탕의 원료로 사탕무(sugar beet)도 있다. 주로 냉대 및 온대 지방에서 재배되며 뿌리즙에서 설탕을 만든다. 러시아, 프랑스, 미국, 독일, 우크라이나, 터키, 폴란드, 중국, 영국, 이집트 등이 주요 생산국이다.

생육조건이 맞는 다양한 지역에 여러 종의 사탕수수가 자생하였다. 그 중 Saccharum barberi는 인도에서, Saccharum edule와 Saccharum officinarum은 뉴기니에서 자생했다. 바로 이 사탕수수의 줄기를 짜서 채취한 수액에 함유된 수쿠로오스라는 蔗糖을 인도인들은 이미 5천 년 전부터 이용했다. 8세기경 압바시드 이슬람 왕조 치하의 무슬림들과 아랍 상인들에 의해 설탕이 아랍 세계로 유입된 후 곧 이어 지중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그리고 안달루시아 등지로 전파됐다. 10세기에 이르면 메소포타미아 모든 마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된다. 신대륙에 설탕을 보급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데, 주로 안달루시아 출신의 스페인 사람들은 모로코 서방 100km 거리에 위치한 카나리아 군도 사탕수수밭에서 재배한 수확물을, 포르투갈인들은 자국 남서쪽 대서양 상의 마데이라 군도 사탕수수밭에서 생산한 수확물을 수출했다. 콜럼버스가 카리브 제도에 사탕수수를 들여온 것은 그의 두 번 째 신대륙 항해 때였다. 식민지 시대 때 설탕은 유럽의 공산품, 아프리카의 노예와 더불어 신세계 원료 삼각무역의 한 축을 차지했다. 카리브해에서 유럽과 북미 동부의 뉴잉글랜드 행 선박에 실린 설탕은 목적지에 도착해 럼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됐다. 

사탕수수대로 만든  큐피드의 활

라틴어로 ‘사랑’이라는 의미의 아모르(Amor)로도 알려져 있는 큐피드는 욕망과 애욕적 사랑, 매력, 애정의 신이다. 그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와 전쟁의 신 마르스(Mars)의 아들로 희랍 신화에서는 에로스(Eros)로 묘사된다. 배우자는 나비 날개를 단 미녀로 묘사되는 프시케(Psyche)이다. 그의 상징은 활과 화살인데 그 활은 사탕수수대로 만든 것이다.

사진1. 앵무새를 타고 목표물을 향해 꽃화살을 날리는 까마신.
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Kamadeva

인도 신화에는 까마데바(Kamadeva)라는 신이 있다. 까마는 ‘性’, 데바는 ‘神’이다. 그냥 까마(Kama)라고도 하고 만마타(Manmatha) 등으로도 불리는 이 까마데바神은 사랑의 신 또는 性慾의 신으로서 로마 신화의 큐피드(Cupid)에 해당한다. 양친은 브라흐마(Brahma)신과 비슈누(Vishnu)신, 형제자매는 아그니(Agni)와 봐루나(Varuna)와 봐유(Vayu)다. 공교롭게도 그의 무기 또한 사탕수수대로 만든 활과 꽃 화살(pushpa dhanu and pushpa shar)이다. 

까마신과 짝을 이루는 배우자 신은 라띠(Rati) 여신이다. Rati라는 이름은 ‘즐기다(enjoy)’ 혹은 ‘기뻐하다(delight in)’라는 뜻을 지니는 고대 범어 어근 ram에서 왔다. 어원상으로는 즐길 수 있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만 실제로 Rati가 지칭하는 것은 ‘성적 사랑’이다.

까마데바는 큐피드처럼 활을 가지고 다녔다. 인도의 신들 가운데서 가장 잘생겼다는 이 사랑의 신은 앵무새를 타고 다니며 꽃이 달린 화살을 쏘았다. 아내 라띠(Rati: 욕정)와 친구 바샨따(Vasanta: 봄)가 그와 동행하며 화살을 골라 줬다. 주로 봄에 활동했는데 무분별하게 욕정의 화살을 쏘아대기를 즐겼다. 과녁으로는 주로 어린 소녀나 유부녀, 금욕주의자를 선호했다. 결국 신들의 왕인 시바(Shiva)의 명상을 방해한 것에 대한 벌로 까마데바는 불에 타서 재가 돼버린다. 까마데바의 활은 사탕수수 줄기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잉잉거리는 꿀벌 떼가 활시위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Kama가 비시누 뿌라나(Vishnu Purana)와 바가봐따 뿌라나(Bhagavata Purana)에는 비슈누(Vishnu)신으로,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에는 불의 여신 아그니(Agni)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고대 인도어 아그니가 우리말에서는 아궁이,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는 아궁(Agung)으로 남아 있다. 시바(Shiva)와 크리슈나(Krishna)로도 불렸다. 

사진3. 사랑과 탐욕과 쾌락의 여신, 라띠.
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Rati

설탕의 탄생과 전파

설탕은 印度亞大陸(the Indian Subcontinent)에서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생산량이 많지도 않았고 가격도 비쌌다. 때문에 국제적 교역이 이뤄지기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천연꿀이 사용되고 있었다. 인도 정복 전쟁 중에 처음 설탕을 접한 알렉산더대왕은 꿀과는 다른 꿀의 단맛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알렉산더와 희랍 병사들이 접한 인도어는 범어 Sharkara였는데, 발음은 마치 saccharum (ζ?κχαρι)처럼 들렸던 듯하다. 사실 전자는 설탕을, 후자는 사탕수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인공 감미료’를 뜻하는 말로 영어에서 빌려 쓴 사카린(saccharine)은 바로 범어 saccharum로부터 왔다.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도 설탕은 없었고 꿀은 주요한 교역 품목이었다. (기원 9세기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에 정착한) 루스족은 설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상품이었던 꿀, 그리고 심지어 기온이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도 고급 의류와 의장품에 필수적으로 사용됐던 사치품인 모피 등을 그 광대한 산림지대에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족은 여전히 쉽게 노예들을 포획할 수 있었다. 이런 노예들은 모슬렘의 하렘(harem)과 비잔틴의 상류층 집안이나 작업장 덕택에 판로가 보장됐을 뿐 아니라 이윤도 많았다. 따라서 9세기에, 프랑크제국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지중해가 폐쇄된 이후 고립돼 있었지만, 반대로 남부 러시아는 이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2개의 상업중심지(인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들의 상품을 판매했다(앙리 피렌느의 『중세 유럽의 도시』 48쪽).  

진취적이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루스족이 상업 활동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타고난 자질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흑해와 카스피해를 주 무대로 하던 루스족이 진출하기 이전 이곳에는 이미 아랍, 유대인, 비잔틴 상인들이 빈번히 왕래하며 활발한 교역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사진4. 사탕수수 농장.
사진 출처=https://www.google.co.kr/search?q=sugarcane&rlz=1C1NHXL_koKR755KR755&source=
lnms&tbm=isch&sa=X&ved=0ahUKEwiOtqC8oqbbAhXEUrwKHUspBjcQ_AUICigB&biw=1097&bih=542

원래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씹어서 당분을 섭취했다. 서기 5세기경 굽타왕조 때의 인도에서 사탕수수즙을 저장과 운송이 용이한 설탕이라는 결정체로 만드는 방법이 발견됐다. 인도 현지어로 설탕 결정체는 khanda라고 불렸으며, 이 말이 candy의 어원이 되었다.

보급품으로 설탕과 버터를 적재한 인도 선원들은 다양한 무역로를 따라 교역을 하며 자신들이 접하는 사람들에게 설탕에 대한 지식을 소개했다. 포교와 순례 여행에 나선 불교 승려들은 설탕 정제법을 중국에 도입했다.  

북인도의 하르샤가 지배하는 동안(606~647), 중국의 당나라로 파견된 인도의 외교 사절단은 당태종(626~649)이 관심을 보인 후에 사탕수수 재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곧 중국은 7세기에 첫 번째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했다. 중국의 역사 기록들은 서기 647년에 설탕 정제법을 익히기 위해 파견된, 적어도 두 번의 사절단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포함하는 남아시아에서 설탕은 중요한 음식과 후식의 재료가 됐다.

그래서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전 세계의 정치가들과 실업가들은 설탕의 생산권 확보와 그 유통의 장악 문제를 놓고 온갖 지혜를 짜내느라 고심했다. 그 결과 브라질이나 카리브 해의 섬들에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대농장, 즉 플랜테이션(plantation)들이 만들어졌다.

설탕을 의미하는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어(Dravidian)의 한 지파인 타밀어(Tamil) Sakkarai가 범어(Sanskrit)로 유입되어 sarkar가 되고, 다시 페르시아어(Persian)  shekar로 모습을 바꿨다가, 여기서 아랍을 만나며 아랍어(Arabic) sukkar로 顯現했다가, 마침내 영어 sugar로 최종 변신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고대로부터 상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서양의 바다와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교역로를 넘나들었다. 사막지대는 물론 험준한 산악도 불사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했고, 눈 덮인 히말라야, 힌두쿠시, 천산산맥을 넘었다. 아라비아해를 헤치고 인도양을 가르며 목숨을 걸고 돈벌이에 나섰다. 이런 상업활동이 문명의 교류, 문화의 전파를 가능하게 했다. 

설탕의 변신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것은 570년의 일이다.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태어난 그가 메디나로 쫓겨 갔다가 힘을 길러 다시 메카로 돌아와 포교를 시작한 건 그의 나이 43세 되는 613년이고 그가 죽은 건 632년이다. 그의 사후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코란”을 앞세운 이슬람군은 아라비아 반도 완전 정복에 이어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수중에 넣고 그곳을 수도로 삼는다. 10년 뒤인 64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하고 이집트를 이슬람화한다. 644년에는 트리폴리를 정복해 리비아 지방을 이슬람화한다. 670년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남쪽 150km 지점에 카이루안이라는 이름의 북아프리카 최초의 아랍인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이슬람교의 확장 전파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8세기 초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제패한다.

이슬람교도가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자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들과 대치하게 된 기독교 세계의 주민들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을 사라센이라고 불렀다. 사라센이라는 용어는 아랍인 전체가 아닌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그러나 4세기 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편에 서 용감하게 싸운 시리아인을 사라센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한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던 사라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무함마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천년 중세시대동안 사라센은 아랍인뿐만 아니라 아랍인에게 정복돼 무슬림이 된 베르베르인과 무어인까지 포함해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전체를 지시하는 명칭이 됐다. 

사진5. 사탕수수 쥬스. 사진 출처=https://www.google.co.kr/search?rl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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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이슬람 해적선이 시칠리아 섬 남동해안의 도시 시라쿠사를 급습한다. 그리고 도시를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800여명의 남녀를 포획해 알렉산드리아 노예시장에 내다 파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렇게 시작한 사라센의 해적질은 천년이나 지중해를 공포의 대양으로 만들었다.

太守인 아미르(amir)가 통치하는 아랍 도시 카이루안을 거점으로 사라센의 해적질은 국영사업이 되고,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는 가장 만만한 표적이 됐다. 그 결과 인도에서 태어나 아랍의 수중에서 성장한 설탕이 유럽을 만나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된다.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젤라또, 그 어느 것도 이것과 단맛을 비교할 수 없는 마카롱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곡절이 숨어 있다. 시칠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북부, 사랑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베로나의 마카롱이 유난히 달콤한 건 우연일까? 바다를 마주한 반도 서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나폴리의 아이스크림이 천국의 맛을 낼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사라센이 전한 설탕이 자리 잡고 있다. 

9세기에 아랍에 의해 사탕수수가 시칠리아에 들어오면서 시칠리아 요리에 혁명이 초래된다. 9세기 이전에는 현지에서 나는 벌꿀이 시칠리아 얼음과 소르베(sorbet) 즉 셔벗(sherbet)의 단맛을 내는데 이용됐다. 단맛에 관한 한 설탕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시칠리아 아이스크림 젤라또는 사탕수수 즙을 정제한 설탕으로 만든 셔벗을 베이스로 해서 탄생한 아랍의 창작품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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