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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전파의 역사가 곧 인류 문명의 역사”
“언어 전파의 역사가 곧 인류 문명의 역사”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6.04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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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2018.5) 한글로 집필한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스스로를 독립학자, 작가로 소개하는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가 한글로 집필한 첫 책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2018.5)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윤상민 기자
스스로를 독립학자, 작가로 소개하는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가 한글로 집필한 첫 책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2018.5)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윤상민 기자

편하게 구사하는 언어는 영어, 한국어, 일본어. 독해할 수 있는 외국어는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라고 한다. 그 외 라틴어, 중국어, 몽골어, 한문, 북미 선주민어 등 10개가 넘는 외국어를 익혀 온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가 ‘한글’로 책을 썼다. 외국어가 전파되는 과정에 권력층과 피지배층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이를 세밀히 추적하고 재구성해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2018.5)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각국 도시 생활자이면서 한국에서는 서촌에 한옥을 지어 살기도 한 그가 한글로 쓴 책에 얽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봄비가 내리는 5월의 어느 날,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수없이 받은 질문이었겠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어에 빠져든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시간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방학기간 두 달 동안 일본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그 가족들이 반복적으로 쓰는 단어들을 듣고 머릿속에서 혼자 의미를 만드는 거예요. 약간씩 이해하고 써보니 통하더라고요. 통한다는 그 순간적인 느낌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번째 외국어인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죠.”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시작한 외국어지만 그가 훌륭한 외국어 발음을 구사하게 된 데는 부친의 공이 크다. “아버지가 파이프오르간 제작회사를 하셨거든요. 아버지한테는 ‘음악은 바흐’였어요. 바흐 음악이 수학적이면서 테마가 반복·변주되니까요. 그 덕에 어릴 때 클래식음악을 많이 들었죠. 돌이켜보면 소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제가 외국어를 배울 때 발음을 좋게 내는 데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거죠.”

40여 년을 외국어와 보내면서 그는 소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봤다. 각 문화권에 속한 개인의 발견, 생각과의 만남은 파우저 씨의 시야를 넓혀줬고 지적 자극을 줬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면서 늘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문화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외국어는 여러 문화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지배-피지배 관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 있는 문화권이 힘이 없는 문화권을 지배하면서 자국어를 약자에게 강제로 가르치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어요. 19세기 영국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20세기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죠. 외국어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에 존재하는 어두운 역사에요.”

‘외국어’라는 단어는 근대 국가의 형성 이후 등장했다. 외국어의 대명사로 영어가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영국의 거침없는 활보에서 시작한 것이고, 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영향으로 외국어로서 영어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진 것처럼. 

통상 지배층의 언어가 피지배층으로 확산되는데, 파우저 씨는 ‘권력’과 ‘자본’이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그는 책에서 종교의 확산 과정, 인쇄기술의 발달, 사전 편찬 등의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 속에서 외국어가 전파돼가는 과정을 살폈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중동에서는 고전 아랍어,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중국에서 한자 그리고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마야어가 문자를 통해 패권을 형성했죠. 문자의 학습은 지배층 진입 및 유지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어요.”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 윤상민 기자

그는 종교의 확산과정이야말로 외국어 전파의 역사라고 단언한다.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지식인의 척도로 여겨졌던 중세유럽이 그 대표적 사례다. “문자를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주류계층으로 편입하는 우선 조건이었기 때문이에요. 1517년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권력자들이 반기지 않은 건 당연지사였죠. 외국어 전파와 학습은 매우 한정된 소수에게 불과했고, 이로 인해 권력의 집중화가 이뤄졌거든요.” 그는 인쇄술의 발전이 외국어의 전파에 혁명적인 기폭점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종교개혁, 금속활자의 발명, 아시아를 찾은 유럽의 선교사들, 전쟁의 세기, 도서관의 건립, 사전 편찬…. 인류 문명의 변곡점에는 늘 언어의 전파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언어 전파의 역사가 곧 인류 문명의 역사”라고 단언한다.

불쑥 한글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한국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과학적인 언어로 인정받고 있는 한글. 한류바람을 타고 외국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설치되는 추세이기도 하지 않은가. 문명어로서의 한글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독일이 라틴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철학하기를 시작했을 때 독일철학계가 풍성해졌듯이, 한글로 철학을 하는 시대가 오면 한국학계의 한 단계 성숙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부정적이에요. 일단 문자를 전하는 건 고대 문명어인 한문에서 한자가 한국, 일본에 전해졌고요, 로마자는 유럽에 퍼져나갔죠. 게르만은 문자가 없었고요. 이 시대가 끝난 거예요. 상대적으로 작은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어는 문자가 없는 언어가 많지만, 한글을 쓸 일이 없죠. 식민지 언어인 영어, 불어, 포르투갈어를 쓸 수 있으니까요. 한국의 인접 지역들은 다 언어가 있고, 아프리카는 멀잖아요. 한 가지 더, 한글은 이미 문자가 있는 언어를 이해하는 문자에요. 한자의 대안인 셈인데, 언어역사에서 찾기 힘든 혁명적인 사례죠. 그걸 해냈어도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배계층들은 여전히 한문을 썼죠. 문자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가 내리고 싶었던 결론에 도달한다. “외국어는 개인의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의해 좌우되며 역사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의 시대에 외국어 학습의 형태는 어떻게 변화할까? 그가 얼마 전 인천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구하며 겪은 일화를 얘기해준다. “열흘 정도 묵을 곳이었어요. 집 앞에 도착했는데 집주인 분이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요. 그런데 이분이 번역기를 돌리면서 저랑 대화가 통하더라고요. 외국어는 도구인데, 그 필요성이 없어지면 흔히들 말하는 ‘스펙’ 체계가 사라지게 돼요. 엔지니어가 쓰는 영어 매뉴얼도, 무역 계약서도 자동 번역되는데 외국어 학습이 뭘 위해 필요할까요? 전 아마도 소통, 취미생활과 관계있지 않을까 예상해요.” 외국어 학습이 모두에게 필수가 아닌, 개인의 필요에 따른 선택이 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예측이다.

그가 ‘외국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인다. “한국에 시집 온 베트남 며느리가 쓰는 베트남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지 않나요? LA에 한국이민자가 10만 명인데, 그들이 쓰는 한국어도 외국어가 아니라 커뮤니티 랭귀지가 되는 거죠. 이민자들을 두고 보면 외국어 개념은 이미 무너진 건데 사람들이 개념적으로 아직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독립학자, 저술가로 소개하는 로버트 파우저 씨는 다음 책에서 그동안 살았던 도시에 대해서 쓸 예정이다. “도시의 활기가 뭔지 이야기하고 싶어요. 도시재생이란 말이 유행하지만 건축적인 느낌이 크고요, 生은 살아있다는 거니까, 도시의 활기와 공간을 활용하는 내용이 담긴 책을 구상하고 있어요.” 각국 도시 생활자로서 그의 진면목이 담길 것이고, 또 거기서 또 어떤 문화사적 맥락을 읽어낼지 벌써부터 그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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