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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 탄생 축하하듯 마음 淨化시키는 아홉 마리 용 형상화 된 고려청자
석가 탄생 축하하듯 마음 淨化시키는 아홉 마리 용 형상화 된 고려청자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평론가
  • 승인 2018.05.2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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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4. 청자구룡정병(靑磁九龍淨甁)

전 세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陶磁器 淨甁은 일본 야마토문화관에 소장된 ‘高麗靑磁九龍淨甁’을 꼽을 수 있다(사진1).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이 淨甁은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에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출토돼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전하지만 최상급의 청자가 강진군에서 사용됐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고 高麗國의 王都였던 개성부근의 왕릉급 古墳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이런 기형의 정병은 다른 사례가 없고 유일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문 생산한 것으로 보이며 특별한 주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王都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청자구룡정병
사진1. 청자구룡정병

淨甁은 梵語 군티카(Kundika)에서 유래한 것으로 감로수를 담는 甘露甁, 水甁, 寶甁이라고도 한다. 가장 깨끗하고 성스러운 물을 담아서 衆生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 이런 역할을 하며 석굴암의 梵天이나 帝釋天 등도 持物로 들고 있다(사진2). 

사진2. 금동미륵보살입상(삼국시대)

처음에는 승려들이 마실 물을 담던 휴대용 수행도구의 필수품으로 시작된 정병이 부처님에게 淨水를 바치는 供養具나 미륵보살의 持物로 확대되면서 일반 가정으로도 널리 사용돼 보편화 됐다. 따라서 정병은 종교적인 의미에 祈福과 豊饒를 기원하는 의미가 결합돼 사용자의 身分에 맞게 金이나 銀, 靑銅, 靑磁, 陶器 등 여러 가지 재질로 제작됐다. 金이나 銀은 워낙 귀한 금속으로 대부분 상징성만 부여한 작은 크기로 제작됐으며(사진3), 실제 용도로 사용된 것은 도자기나 청동으로 제작된 정병이었다. 

사진3. 은제소정병(국립중앙박물관)
사진3. 은제소정병(국립중앙박물관)

정병의 모양은 일반적인 병 모양을 한 것과 몸통의 어깨부분에 注口가 달리고 기다란 목과 뾰족한 첨대(注入部)를 지닌 두 종류가 있다. 고려시대 유행하던 정병은 대체로 後者에 속하는 형태가 많으며 도자기와 금속기가 병행해 제작됐다. 

금속으로 제작된 정병 중에 대표적인 유물은 국보 제92호로 지정된 ‘靑銅製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몸통인 청동에 銀絲를 박아 넣은 銀入絲技法을 사용해 高麗國에서만 유행하던 물가풍경을 시문했다. 아울러 정병의 목과 첨대사이에 둥그런 환테와 주구의 뚜껑에는 화려한 당초문양의 銀透刻版을 끼웠고 바닥 굽에도 銀版을 끼워 화려함을 배가시켰다(사진4). 

사진4.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
사진4.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

도자기로 제작된 上品의 정병은 일본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청자반양각연당초문정병’(네즈미술관 소장)과 국보 제66호로 지정된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간송미술관 소장)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사진5, 6). 

사진5. 청자반양각연당초문정병(일본 네즈미술관)
사진5. 청자반양각연당초문정병(일본 네즈미술관)
사진6.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간송미술관)
사진6.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간송미술관)

이런 上品의 정병이외에도 ‘청자갑술명정병’(사진7)처럼 中品에 해당하는 정병도 만들어졌으며 陶器로도 많이 제작됐다. 여러 재질의 정병이 제작된 것은 고려시대 정병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의미한다.

사진7. 청자철화 갑술 명정병
사진7. 청자철화 갑술 명정병

(사진1)의 ‘고려청자구룡정병’은 아홉 마리의 龍을 정병으로 형상화 한 유일한 작품으로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며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용 문양을 주제로 정병을 제작한 사례도 청자에는 없으며 금속으로 제작한 사례도 통도사에 소장된 ‘청동제은입사용문정병’이 유일하다(사진8).

사진8. 청동은입사용문정병(통도사)
사진8. 청동은입사용문정병(통도사)

이 정병의 첨대에서 어깨부분까지 모두 아홉 마리의 龍頭가 달려있는데 첨대 끝의 용두와 몸통의 어깨부분에 달려있는 용두는 注入口와 出水口로 병과 통했으며 나머지는 장식용으로 막혀있다(사진9).

사진9. 구룡정병의 용두
사진9. 구룡정병의 용두

이처럼 出水口를 용머리로 장식한 주전자의 사례는 몇 점이 전해지는데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청자상감갈대문용머리주전자(사진10)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자귀룡형주자(사진11),(사진12) 청자어룡형주자(사진13)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마리의 용을 입체적으로 형상화 한 사례는 없으며 ‘고려청자구룡정병’이 유일하다.

위의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위의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정병에 조각된 용머리를 보면, 모두 틀에서 찍어낸 후에 섬세하게 조각하여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벌려진 입에 이빨과 송곳니, 길게 내민 혀, 높게 들린 윗입술, 휘날리는 갈기와 턱수염, 부릅뜬 눈, 커다란 콧구멍, 정돈된 눈썹과 여러 갈래로 뻗은 뿔까지 정교하게 표현했다. 아울러 아홉 마리의 용 눈동자에는 철화안료로 검은 점을 찍어서 ‘畵龍點睛’ 했다. 

몸통과 목 부분은 아홉 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는 데 半陽刻과 陰刻을 적절히 섞어서 조화롭게 어우러져있다. 균형 잡힌 높이 33.5cm의 크기로 불교의례용으로 실제 사용한 實用器로 보이며 철분이 적은 靑磁胎土와 맑고 투명한 翡色 고려청자만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머리 부근에는 출토흔적인 흙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 유약이 酸化된 것도 보인다. 굽바닥 역시 많이 산화됐으나 燒成당시 내화토받침의 흔적이 남아있다.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하늘에는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피어올랐으며 아홉 마리의 용이 내려와 축하하며 瑞氣를 내뿜어 아기 석가모니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 후로 龍은 佛法을 守護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정병이 의미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탄생 때처럼 아홉 마리의 龍이 방금 태어난 석가모니의 몸을 닦아 주듯이 순수한 성수를 담아 마음을 淨化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과거 우리 민족이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 세계적인 명품 ‘고려청자구룡정병’은 盜掘돼 他民族의 國家指定文化財가 됐지만 현재의 소유자가 他國이라 해서 遺物의 國籍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현재 누가 소유하고 있든, 앞으로 누가 소유하게 되던, ‘고려청자’임에는 변함이 없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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