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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행동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 문성욱 소르본대 박사과정생
  • 승인 2018.05.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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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대학은 지금_ 『지금의 중세』(프랑스, Arkhe 刊)가 시사하는 점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는 잠언은 식상하리만치 자주 반복돼 왔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무엇을 두고,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구체적으로 판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대화를 빙자한 곡해가 여기저기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당장의 사정이 우리를 더욱 머뭇거리게 한다. 고대나 중세와 같이 까마득한 옛 시간조차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의 사례만도 벌써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가령 이곳 프랑스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유럽의 ‘기독교적 뿌리’를 지켜야 한다고 외치며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의 공세를 막아낸 샤를 마르텔을 전범으로 삼는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의 함정들이 숱한 만큼 직업적 역사가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가는 대학이라는 마지막 거점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객관적 진실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바쳐야 하는 것일까.

중세의 시사성

이 질문에, 지난해 말 프랑스에서 출간된 『지금의 중세(Actuel Moyen Age)』(파리, 아르케Arkhe 출판)는 소박하고도 흥미로운 답안 하나를 제시한다. 260여 쪽의 이 얇은 책을 함께 쓴 네 명의 저자는 모두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중세사 연구자이다. 그중 플로리앙 베송(Florian Besson)은 십자군 국가의 정치문화에 대한 연구로, 카트린 키쿠치(Catherine Kikuchi)는 1469-1530년 베네치아의 인쇄산업을 다룬 작업으로 최근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폴린 게나(Pauline Guena)와 아나벨 마랭(Annabelle Marin)은 각각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의 관계, 15세기 카스티야 지방 귀족층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주제로 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함께 쓴 이 책은 그런데 원래 ‘책’이 아니었다. 출발은 2016년 1월 개설된 동명의 블로그로, 한 주에 한 번꼴로 연재하던 글들이 출판사의 눈길을 끌어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된 것이다(블로그는 지금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가족, 젠더, 섹슈얼리티」, 「그날그날의 삶」, 「종교와 문화」, 「권력의 움직임」, 「세상의 변두리」, 「생태학」 등 여섯 꼭지로 나누어진 수십 편의 짧은 텍스트들은 저자들의 연구대상뿐 아니라 중세 전반, 때로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는 긴 시간으로부터 다양한 소재를 긷는다. 하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연구 과정에서, 우리는 중세에 오가던 말과 그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들의 시사성에 자주 놀라움을 느꼈다. 이 놀라움이 우리로 하여금 저 자료를 작금의 사건들에 맞세워 보게 했다.” 최초의 인상은 한낱 착시의 소산일지 모른다. 그러나 착시는 때로 어떤 ‘진실’의 징후이기에 그것을 따라가 보는 일은 무익하지 않다. 예를 들어, 1271년 키프로스의 기사들이 왕의 독단적 결정에 반대해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사태를 ‘파업’이라 칭해도 될까? “키프로스 왕국의 기사들에게는 현수막도, 슬로건도, 노조도, 시위도 없었다. (…) 하지만 주인, 영주―당시 말로는 ‘patronus’―와의 힘겨룸으로서, 이것은 파업이라 할 만하다.”

대담한 비교에서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먼저 “중세 기사는 야만적 전사인 이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 그를 움직이는 것은 살육의 충동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 이익과 손해에 대한 나름의 계산이다. 다음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파업은 구체적 조치 너머, 권력의 분배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한다는 것. “요구사항이 무엇이냐는 점보다 중요한 것은 요구한다는 행위 자체이다. 말 혹은 침묵을 통해, 파업 참가자들은 노동자일 뿐 아니라 행위자로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맞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프랑스의 정세에서 이 ‘시대착오적’ 성찰은 현재적인 울림을 띤다.

생산적인 시대착오

물론 13세기 귀족 계급은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애초부터 여하한 계보를 그리고자 하지 않는다. 옛 경험으로부터 만고불변의 지혜를 도출하는 것도 관심사가 아니다. 미래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사회변화의 전문가라 할지언정, 역사가는 어쨌든 매우 쓸모없는 예언자이다.” 반면, 중세와 현재가 맞닥뜨릴 수 있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은 도리어 양자의 관계가 연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부인할 수 없는 유산들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단절이 둘 사이에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중세와의 만남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그것은 따라서 돌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교차와 短絡의 움직임을 띤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에는 과거에 대한 특정한 태도가 함축돼 있다. ‘현대성이 저 너머에 있다면?’이라는 책의 부제 드라마 「X-파일」의 유명한 전언, ‘진실은 저 너머에’의 패러디―는 바로 그 태도에 비추어 이해돼야 한다. 관건은 중세에서 현대의 뿌리를 찾으려는 목적론적 접근을 넘어 중세가 자신의 문제들과 맺는 내재적 관계를, 다시 말해 중세 ‘안’의 현대성을 포착하려는 시도에 있다. 철학사가 에티엔 질송의 말마따나 중세인들은 자신들이 중세를, 고대와 근현대 사이의 긴 막간을 살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스스로를 현대인이라 칭했다.

이상의 조건을 의식할 때, 시대착오는 생산적일 수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동일시가 아닌, 양자로부터 거리를 두며 둘 사이의 관계를 다시 사고하기 위한 계기가 된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대해야 할 최악의 적은 ‘원래 이런 거야’나 ‘이게 당연하지’ 같은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적’ 앞에서,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말을 달리는 책표지의 기사처럼, 문체는 시종일관 경쾌하며,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질색할 만한 영어식 유행어조차 마다하지 않는 무람없음이 역설적으로 저 비판적 거리의 형성에 일조한다. 이 말투를 빌려, 12세기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기사도 소설 『수레를 탄 기사』가 그리는 랑슬로와 그니에브르의 ‘궁정적 사랑’이 1990년대 미국 TV 드라마 「프렌즈」 주인공들 사이의 ‘밀당’과 나란히 놓이면서, 사랑의 내밀한 관계 뒤에서 각 시대에 고유한 ‘사회적 환상’의 배경막이 드러난다. 바닷가에 내다 버린 폐수가 내뿜는 악취로 골머리를 앓던 항구도시 아크레에서 ‘제단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의 창문을 닫아걸었다는 이야기는 환경 문제에서 눈을 돌린 채 근본적 대응을 미루는 우리 자신의 자세와 겹쳐진다.

다른 한편, 저자들은 곳곳에서 ‘암흑의 시대’에 대한 끈질긴 선입견을 정정하려 애쓴다. 중세는 시계를 비롯해 온갖 자동기계를 만들어 낸 발명의 시대였고 (비록 기술과 마술이 자주 혼동되었지만), 14세기 남자들 사이에서는 맨살이 드러날 정도로 짧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옷이 유행했으며 (당연히 성직자들은 분노했고, 그리하여 백년전쟁 초기 프랑스가 크레시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이 타락상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해석했지만), 이단심문은 흔한 짐작과 달리 화형보다 참회와 개종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선을 넘어서는 광신적 심문관들을 배제하기 위해 애썼다(우리로서는 그 ‘선’마저 용인할 수 없겠지만).

역사학자로서 행동하기

『지금의 중세』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을 주요 독자로 상정한 책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최소한의 직업적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점은 특별히 강조돼야 한다. 책이 다루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사실에 관한 전거 및 주요 연구서―특히 최근의 성과―는 매번 꼼꼼하게 밝혀져 있다. 중세의 젠더와 성, 놀이, 환경 등 일견 생소한 주제들도 어느 한 명의 호기심이 아니라 학계 전반의 흐름을 반영한다. 요컨대 이 네 명의 역사학자는 본연의 임무를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題詞로 쓰인 마르크 블로크의 일화를 참조하면, 그들은 오히려 이 독특한 글쓰기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임무라 여기는 듯하다. “나는 앙리 피렌과 함께 스톡홀름에 간 적이 있다. 도착하자마자 그가 말했다. ‘먼저 어디를 가 보면 좋겠소? 최근에 지은 시청이 있는 것 같던데, 거기부터 가 봅시다.’ 그리고는 무슨 놀라움을 앞지르려는 듯 덧붙이기를, ‘내가 골동품상이라면 낡은 물건에만 눈길을 주겠지. 하지만 나는 역사학자요. 그래서 나는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오.’” 몇 쪽 뒤, 책의 제목을 설명하면서, 블로크와 피렌의 먼 후배들은 ‘지금의(actuel)’의 어원이 된 라틴어 ‘actualis’가 ‘적극적인, 행동하는’의 뜻을 품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말하는 『지금의 중세』란 행동하는 중세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처한 역사 속의 행위자임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만이라도.” 이 ‘우리’는 역사학자로서 말하며, 그것이 그들의 행동이다.

 

 

문성욱 소르본대 박사과정생·중세프랑스문학
13세기 시인 뤼트뵈프를 통해 중세문학에서 ‘저자’의 출현과 역사적 조건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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